▒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01-07 12:24
제 목
조선 왕조와 한의학 13 - 명종(2)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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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잘 걸리는 것은 몸속의 보일러인 신장의 양기가 약하다는 신호
면역력 약했던 ‘명종’, 질병 중 단골 메뉴는 ‘감기’

명종은 즉위 직전 역질(疫疾)을 앓았다. ‘면역’이란 단어의 ‘역’이 역질인 점을 감안하면 현대적으로 볼 때 면역력이 약했던 것이다.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잘 걸리는 감기는 명종의 질병 중 단골 메뉴였다. 명종 8년 환절기에 바람을 쐬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나른하다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12년 10월 27일 날씨가 따뜻하지 못해 감기를 오래 앓고 있다면서 궁전 처마 밑에 털로 장막을 쳐서 임금을 추위로부터 보호했다고 할 정도였다.
13년 11월과 14년 1월에도 각각 기침과 어지러움, 감기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감기에 잘 걸리고 추위를 잘 탄다면 이는 몸속의 보일러인 신장의 양기가 약하다는 신호다. 양기가 약하다는건 스태미나가 약하다는 의미다. 신장은 차가운 쪽과 뜨거운 쪽 양면이 있다.

차가운 쪽이 물을 상징하는 신수(腎水)라면 신장의 뜨거운 부분인 명문(命門)은 보일러이며, 흔히 단전(丹田)이라는 붉은 밭과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의학의 부신(副腎)처럼 보일러와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명문은 생명의 문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보일러 구실을 한다. 신장의 양기를 상징하며, 남자의 스태미나를 내포한다. 명종은 스태미나가 약했던 만큼 자식 농사도 힘들어 순회세자 하나만 낳았는데 일찍 죽고 만다. 즉위년 8월15일엔 문정왕후의 지극한 보호아래 경연과 곡림(哭臨·임금이 죽은 신하를 몸소 조문하는 것)을 중지한다. 

엄마의 극성스러운 보호받은 명종, 자주 疫疾앓아

‘마마보이’ 명종은 엄마의 극성스러운 보호를 받는다. “주상께서 큰 역질을 겪으신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기가 허약하여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 학문과 양기가 모두 중요하나 내 생각으로는 기운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실록의 사관은 문정왕후의 이런 지적을 대놓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기운을 보양하는 것이 학문보다 중요한지 모르겠다’라고 딴죽을 걸었다.

12년 8월 19일의 기록은 세자의 건강에 문제가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옹원 주부 김윤은은 전일에 세자가 어리고 약한 데다 기가 허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약을 잘 조제하여 효험을 보게 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백관을 가자할 때 역시 친수하게 하라.”

18 년 9월 20일 왕세자 이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명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19년 윤2월 24일 명종은 세자를 잃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나의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가 화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이 어지럼증과 곤히 조는 증세가 있고, 밤의 잠자리가 편안하기도 하고 편안치 못하기도 하다.…나이가 3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국가에 경사가 없다. 지난해에 세자를 잃은 뒤 국가의 형편이 고단하고 약해진 듯 하니 심가 어찌 화평하겠는가.”

후계자를 둘러싼 논쟁에서 명종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핏줄을 염두에 뒀다. 그만큼 순회세자의 죽음은 명종의 건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명종 20년 4월 6일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었다. 외삼촌이자 권력의 핵심인 윤원형은 바로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났다. 윤원형의 첩이면서 안방 권력을 흔들었던 정난정은 본처를 독살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왕후의 작은아버지였던 심통원마저 쫓겨나면서 친위 권력이 모두 사라졌다.

이에 본래부터 심열증을 앓던 명종은 큰 충격을 받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20년 9월 15일엔 열이 심해 입시한 신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대신들은 후계자 문제에 대해 절박하게 물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다.”(당시에 상이 하답하기가 어려워서 이같이 하교했으나 실은 후사를 정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대신들은 다시 왕비를 압박했고, 왕비는 마지못해 한글로 하성군 이균(선조)을 지목했다. 이것이 바로 ‘을축년의 하서’다. 

심열증은 명종이 가장 자주 호소한 괴로움이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한 번도 왕권을 행사해보지 못한 마마보이의 전형이다. 윤원형의 전횡이 이어져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임꺽정이란 의적까지 출현한다. 명종 14년 3월 27일 임꺽정 토벌 방안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재상들의 인식은 사태의 본질을 분명하게 환기시켜 준다. “도적이 출현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특이한 상황도 많다. 명종 21년 2월29일 전하는 다음 이야기는 단적인 예다. “사서(士庶)들이 주색을 즐기다 음창(陰瘡·성병)에 걸린 이가 많았다.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그 병이 즉시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통을 받던 이들이 많은 재물로 사람을 사서 죽이고 그 쓸개를 취했다. 종루, 보제원, 홍제원 등에는 걸인이 많이 모였는데 4~5년새 이들이 다 사라졌다. 나중에 이들은 평민에게까지 손을 뻗쳐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다.”

왕세자 이부 잃은 후 명종의 건강 급격히 나빠져

음창은 사타구니에 생기는 부스럼으로 일종의 성병 후유증이다. 이것을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심약한 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 졸기다. “환시(宦侍)를 대할 때에는 매우 질타했지만 외신(外臣)을 대하면서는 조금도 잘못됨이 없게 하였으니, 공론을 두려워하고 조정을 높이는 것이 지극했던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상이 군자를 쓰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 버리고, 상이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에게 붙잡는 것을 이롭게 여겨 서로 이끌어 나왔다.”

외부에 강한 사람은 내부에 약하고, 외부에 약한 사람은 내부에 강하다. 심약한 명종은 내시들에겐 한없이 강했지만, 외부로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거나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22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문제로 왕은 지레 겁을 먹고 고민했다. 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이 평소 심열이 있는 데다 더욱 사신에 대한 생각에 열증을 돕는 징후가 없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심열증이 심해지면서 명종의 체질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실록 20년, 명종은 자신은 본래 약한 체질로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는데 더욱 심해져서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해 음식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명종, 간열과 비허로 제대로 인사를 살피지 못해

21년 9월 13일에도 명종은 자신이 약질로 본디 심열이 있어 병을 자주 앓는데 계해년에 세자를 잃고 매우 상심하고 다시 어머니의 상을 만나 마음이 한없이 괴롭다고 호소한다. 22년 6월 9일에도 위는 뜨겁고 아래는 냉한 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그때마다 토로하는 괴로움은 한의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상열 하한증이었다. 음양오행론에서 심장은 우리 몸의 엔진이어서 불꽃(火) 같은 힘을 상징한다. 

신장은 겨울을 상징하므로 차가운 물(水)을 나타낸다. 불은 위를 향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상열하한을 치료하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은 마음을 다스려 심장의 열기를 하부로 내리고 신장에 저장된 차가운 물을 데워 상승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명종은 스트레스로 심열이 심해져 불이 위로 향하고 스태미나를 상징하는 신수는 고갈돼 상승할 수 없었다. 평소 의식주 습관도 문제가 있었다. 너무 더운 곳에 거처하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었으며, 찬 음식을 즐겼기 때문에 소화 기능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도 여름에 찬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 지병을 앓은 명종의 소화 기능은 약해 질대로 약해졌다.

22년 6월 27일 실록은 마지막 증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상께서 열기가 위로 치받쳐 올라 인사를 살피지 못한다.” ‘동의보감’은 이런 증상을 간열과 비허로 파악했다. “몹시 성내어 간을 상하면 열기가 가슴에 밀려오고 숨이 거칠고 짧아지면서 끊어질 듯하며 숨을 잘 쉬지 못한다. 지나치게 생각하여 비를 상하면 기가 멎어서 돌아가지 못하므로 중완에 적취가 생겨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오르고 그득하며 팔다리가 나른해 진다.”

성리학은 본성과 천리를 파악하고 수양함으로써 기질과 욕망을 억제하고 경건하게 살 것을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해답을 지닌 치유 체계도 공존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은 왕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았다. 성리학 원리주의자였던 인종과 심약한 마마보이 명종은 그렇게 조선의 이념적 질곡 속에서 죽어갔다.
 
이상곤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