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01-21 16:07
제 목
조선 왕조와 한의학 14 - 선조(1)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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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과 士林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선조’
이명, 위장병, 편두통 빈발…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옮겨져
 
조선의 임금 중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는 하성군(河城君) 이균(1552~1608), 즉 선조대왕이다. 
 선조의 아버지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난 덕흥군 이초(1530~1559)다. 후궁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균이 왕이 된 사실은 많은 풍수가의 입에 올랐다. 창빈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장흥 땅에 있었는데 서울 동작으로 옮기고 난 후 손자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해서 그가 묻힌 동작릉이 풍수학자 사이에서 연구대상이 될 정도였다. 후계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뤄진 방계왕족의 왕위 계승은 곧 벼락출세를 의미했고,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평생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치열했던 선조의 ‘서자 콤플렉스’는 질병으로 이어졌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언급된 선조의 질병이 크게 소화불량과 귀울음(이명), 편두통으로 나뉘는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감기로 인한 기침과 콧물 등 흔한 증상과 근골격계 질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질환이 마음의 병에서 생겨난 질병인 셈. 현대의학으로 말하자면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질환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선조의 庶子 콤플렉스

 선조시대는 사림(士林)이 장악했다. 이들은 송나라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을 추종했다. 적통(嫡統)이 아닌 선조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린 세력이 바로 이들이다. 그 때문일까. 이들 사대부의 역할이 커질수록 왕은 주눅들고 신하는 큰 소리를 쳤다. 왕권의 시대는 저물고 신권의 시대가 도래 한 것 이다. 사림들은 자신이 만든 임금인 선조의 내면세계를 뜯어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선조를 성리학적 이상 군주로 키우려는 교육을 시작한 것. 이황, 이이, 기대승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성리학의 거두들이 모두 선조의 경연강사로 나섰다. 이황은 성학십도를,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선조를 위대한 군주로 키우려 노력했다. 그들은 신하가 아닌 스승에 가까웠고, 정치적 후원자로서 충고를 쏟아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벌어진 사림과의 대결은 선조를 더욱 힘들게 한다. 선조는 왜란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10월26일 분에 못 이겨 이황과 그 제자인 유성룡을 힐난하는 발언을 한다.

 “듣건대 경상도의 풍속은 누구라도 아들 형제를 두었을 경우 한 아들이 글을 잘하면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히면 마당에 앉혀 노예처럼 여긴다. 국가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게 된 것은 경상도가 오도한 소치다.”
 선조는 쟁쟁한 성리학자 사이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을 보냈다. 성리학의 연구는 도덕성명(道德性命)에 편중돼 국가와 국민의 실제 문제에 대한 연구는 적고, 교조적이며 도덕적인 문제에 치중한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해 고금의 모든 유학자는 성(性)과 건강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중국 공자의 ‘춘추(春秋)’를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좌구명(左丘明)이 재해석한 책 ‘좌전(左傳 또는 左氏傳)’에는 전국시대 명의 의화(醫和)가 진(晉)나라 왕 진후(晉侯)의 병을 논의하면서 “그 병은 여자를 가까이하면서 절도에 맞지 않고 때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진단하는 대목이 나온다.

 선조의 질병에 대한 기록도 여색절제에 대한 말로 시작된다. 선조 6년1월3일 신하들 사이에선 선조의 목소리가 끊어져 책 읽는 소리가 이상하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돌기 시작한다. “옥음이 정상이 아닌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어도 오래 끌고 낫지 않으니 입시한 신하로서는 누구나 물러가서 조심합시다.” 
 이후 여러 차례 선조의 이상한 목소리에 대한 근심스러운 논의가 계속되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모두 자제한다. 이런 가운데 율곡 이이가 처음 입시하자마자 포문을 열었다. 이이의 성격을 두고 실록은 “쾌직(快直)하다”고 표현한다. 거침없이 직설적이라는 뜻이다.

 “소신이 병으로 오래 물러가 있다가 오늘 옥음을 듣건대 매우 통리(通利)하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으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는 말을 즐겨 듣지 않으신다하니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맑지 못한 것이 여색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책망이 직설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에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사람의 말소리는 원래 같지 않은 것인즉, 내 말소리가 본디 그러한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라고 답변한다. 실록은 “옥색이 자못 언짢아하며”라며 이때 선조의 불편한 심기를 자세히 적고 있다.

 목소리는 성호르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게 사실이다. 남성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굵어지며 저음이 되고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여자의 목소리는 고음이 된다. 지금이야 성호르몬이 신장 곁에 붙은 부신에서 분비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했다. 한의학은 부신을 신장의 일부인 명문(命門)이라 규정짓고 목소리와 성호르몬의 관계를 당연시하며 생리적으로 설명해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士林과의 끝없는 신경전

과연 선조의 갈라진 목소리는 여색을 밝혀 남성호르몬이 고갈 또는 소진된 데서 기인한 것일까?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선조는 즉위에 즈음해 공부와 정치적 결정에 따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스트레스를 오랫동안 받으면 외향적인 사람은 교감신경이, 내향적인 사람은 부교감신경이 흥분한다. 선조는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부교감신경이 항진되면 감각과 운동신경을 관장하는 미주신경에 과긴장증이 오는데 발성장해로 목소리가 쉬거나 위장운동장애가 생긴다.

 실제 목소리의 이상을 호소한 이후 선조는 위장장애로 위장약을 복용하거나 소화불량 증상을 지속적으로 호소해왔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신하들은 한의학을 유교적 이론으로만 바라보다 실제 스트레스를 유발한 자신들의 책임은 망각했다.

 동의보감은 성음문(聲音文) 첫 구절에 ‘목소리는 신장에서 나온다’고 규정한다. 현대는 자기표현의 시대다. 말을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도 부지기수다. 말로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며 살다보니 성대가 피로해지는 건 당연지사. 성대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목이 마르고 건조해져 결국엔 쉰 목소리가 나온다. 동의보감은 목소리를 윤택하고 탄력 있게 내는 양생법도 소개한다. ‘말하고 외우거나 읽을 때 언제나 기해(배꼽 아래 있는 혈 이름) 속에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선조, 心火가 만든 위장병으로 목소리 이상 호소

 고운 목소리를 내는 약물도 거론했다. 껍질을 벗긴 살구씨, 졸인 우유, 꿀을 반죽해 알약을 만들거나 곶감을 물에 담갔다가 늘 먹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달걀의 효능에 대해서도 ‘흰자는 성질이 서늘해 인후두의 열을 식히고 염증을 없애 목소리를 좋게 한다’고 설명한다. 노래 부르기 전에 날달걀을 먹으면 좋다는 속설도 근거가 없는 게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작 선조를 괴롭힌 병증은 목소리가 아니라 소화불량증이다. 즉위 7년 1월7일 선조는 ‘자주 체한다’, ‘음식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괴로워한다. 사실 스트레스와 소화불량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관이 수축한다. 위의 소화운동을 담당하는 위장관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들도 위축된다. 위장운동 능력이 떨어지면 잘 체하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

호남유림의 거두이자 허준을 발탁하고 후원한 미암(眉巖) 유희춘(1513~1577)은 보다 못해 이런 증세를 음식을 통해 치료하기 위한 식료단자를 지어 올린다. 중국 양생서인 연수서, 수친양로서, 명의잡서, 사림광기 등을 발췌해 만든 식사지침서인 것이다. 가미응신산, 양위진식탕 등 위장기능 개선 처방을 올렸지만 고질이 된 선조의 위장병은 쉽게 낳지 않고 평생을 괴롭힌다.

 선조 34년 선조는 신하들의 그늘에 가려 속마음을 숨기고 화병을 안고 살던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내 병이 다시 도져 고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심화(心火)가 가장 치성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 선조의 위장병은 노년에 극에 달하는데 선조 41년에는 “도통 입맛이 없어 무를 곁들여야 겨우 수저를 든다. 만일 약 중에 무와 맞지 않는 약재가 들어가면 그것조차 못 먹게 될 것 같다”고 말할 정도가 된다.
이상곤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