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04-07 14:46
제 목
조선 왕조와 한의학 - 인조(4)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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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인조 말려 죽인 ‘저주病’
원기 부족 탓 정신질환… 귀신 쫓는 돌팔이가 병 키워
 
 소현세자의 독살설에도 연루됐고 학질에 잘못 대처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았지만 침을 놓을수록 소현세자의 병증은 심해져만 갔다. 소현세자의 병환은 학질에서 시작된다. 인조 23년 4월23일 어의 박군은 소현세자의 질환을 학질로 판정했다. 4월27일 기록에는 “치료 2∼3일만에 세자가 죽고 말았다”는 기록과 함께 이형익에 대한 질타가 잇따른다.

“의관 이형익이 사람됨이 망령되어 괴이하고 허망한 의술로 세자가 오한전율(추워서 덜덜 떠는 증상) 증상이 있는데도 증세 판단 없이 침만 놓았으니 국문하소서.”

소현세자가 걸린 학질은 조선시대에는 아주 흔한 병으로 ‘학질을 앓고 나야 사람이 된다’고 할 정도였다. ‘하루걸이병’이라고도 불렸는데 하루 걸러 발열과 오한을 반복하는 삼일열 말라리아 증세를 가리킨다. 삼일열 말라리아의 치사율은 소아를 제외하면 별로 높지 않았고 자연치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자 잡은 선무당
이형익은 치료에서도 정통의학과는 거리가 먼 오판을 한 것 같다. 오한전율은 양기가 부족해 내부의 저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도 이럴 때는 “약만 쓰고 침을 놓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돼 있다. 그런데도 이형익은 자신의 침술만을 자랑하면서 왕의 원기를 훼손했다. 

학질이 치명적인 질환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학계에선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정설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인조 23년 6월27일의 실록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사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目)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실록은 이형익에 대한 의혹도 제기한다. 인조의 애첩인 후궁 조소용이 인조와 세자 내외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적었다.
“조소용이 세자 및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밤낮으로 왕 앞에서 세자를 헐뜯었다. 대역부도의 행위 및 저주를 했다고 참소했다.” 실록의 또 다른 기록은 조소용과 의관 이형익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며 의심을 한다. “이형익이 조소용의 어미 집에 치료를 위해 왕래했는데 저잣거리에 추잡한 소문이 나돌았다.”

소현세자에게 나타난 증상을 일으키는 독약은 어떤 것일까. 조선 후기 법의학서 ‘증수무원록’에 기록된 독약은 고독과 과실, 금석, 서망초, 비상, 야갈이 있다. 하지만 ‘7개 구멍에 피를 쏟으면서 죽는’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독약은 서망초뿐이다. 서망초는 목련과에 속한 협엽회향으로 양자강 중하류에서 자라며 그 독성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개어서 피부병에 붙이기도 하는 약물이다.

실록은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도 인조가 시신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의 과학수사대(CSI) 기록인 ‘증수무원록’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인조는 대신들의 잇단 국문과 처벌 요구에도 소현세자 사후 더 적극적으로 이형익을 비호했다. 

이형익은 왕 앞에서 거침없는 언행을 하다 대신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인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형익의 은밀한 청을 받고 그 형제와 자식들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마저 박대(薄待)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예법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았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해(인조 24년) 1월 소현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강빈에 대한 진심을 김자점에게 토로했다. 김자점은 인조와 조소용 사이에서 태어난 효명옹주를 자신의 손자와 결혼시켜 왕실의 인척이 된 인물로, 인조의 복심으로 통했다. 조소용, 이형익과 함께 소현세자 독살의 배후로 지목받는 인물이다.

저주한 사람 죽여야 건강?
‘강빈이 심양에서 귀국할 때 재물을 많이 싣고 왔는데 이를 온 조정에 뿌린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예전에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적에 제후들에게 돈을 뿌려 정권을 잡은 자가 결국은 대업을 성취하였으니 어찌 이 일과 다르겠는가.’
인조가 소현세자 부부를 자식이 아니라 왕권을 노리는 대결세력으로 생각했음을 자인하는 말이다. 

인조는 그해 3월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 대신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큰며느리 강빈과 그녀의 남자 형제들을 왕의 음식(전복구이)에 독약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사사했다. 대사헌 김광현이 “소현세자의 병을 형편없이 간호한 이형익의 죄를 강력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 인조는 오히려 “김광현이 강빈 오빠의 사위여서 그런 말을 한다”고 나무랐다.
 
 
이상곤 원장
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