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06-30 12:01
제 목
조선왕조와 한의학 - 숙종(2)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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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주요 질병은 “간질환” 그 범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돼 건강 나빠져
 
숙종은 눈병 때문에도 고생했다. 물론 그 뿌리는 간 질환이었다. 재위 30년 12월11일 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화증이 뿌리내린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로 깊은 고질이 되어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오랜 시간 수응하면 화염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나의 눈병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숙종 43년에는 눈이 어두워져 신하들의 보고조차 장지(壯紙)에 큰 글씨로 간략하게 쓰도록 했다. 심지어 혼례식을 올린 후 인사 온 왕세자 부부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내가 눈병이 이와 같으니 왕세자빈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한의학은 눈을 불의 통로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질환으로 발생한 분노와 초조함의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안신경을 위축시킨다. 숙종의 눈병에 내의원은 공청(空靑)이라는 약물을 썼다. 기록엔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귀한 약물’이라고 돼 있다. 한의학에서 밝히는 공청의 약리작용은 이렇다.
한의학에서 눈은 불의 통로
‘간에 화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기가 위로 치솟아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된다. 간에 열을 내리면 오장이 안정되어 눈의 여러 가지 증상이 회복되는데 공청의 찬 맛은 쌓인 열을 없애준다.”
공청은 양매청(楊梅靑)이라고도 한다. 청은 색깔, 공은 내부가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양매는 모양을 뜻하는데 중국음식점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과일 여지(?枝·리즈)와 비슷하다. 구리가 있는 광산에서 나며 속이 빈 공작석을 가리킨다. 공작석 속에 난 구멍에 물이 들어있는 것을 최고로 여기며 비어 있는 것을 그 다음으로, 속이 찬 것을 하품으로 본다. 좋은 것은 녹내장으로 실명하거나 바람이 불면 눈물이 나는 증상, 눈에 막이 생겨서 가리는 예막((瞖膜) 질환을 치료한다.
하지만 실록은 공청이 그다지 효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시력감퇴 증상을 치료한 약은 무엇이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추론하자면 굼벵이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 청나라 때 나온 약물학서인 본경소증은 굼벵이의 효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체에서 피(血)는 음식물이 위장에서 삭고 삶아지고 쪄지는 더러운 상태에선 벗어났지만 맑은 에너지인 기(氣)로 변환되기 전 상태의 물질이다. 음식물을 받아들여 깨끗한 혈액으로 전환하는 역할은 간이 맡는다. 굼벵이는 더러운 두엄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맑은 매미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더러운 것을 맑게 하는 작용을 한다. 혈액이 말라들어 가거나 나쁜 피를 정화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치료한다.’요즘 시중에서 간염이나 간경화에 굼벵이를 쓰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처방이다.
마지막까지 고통 준 肝
많은 사람이 과연 한의학이 눈 질환을 치료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나타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실명을 일으키는 녹내장도 치료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치료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냉이(정확하게는 냉이의 씨앗)를 썼다는 점이다.
냉이 씨의 약명(藥名)인 석명자(菥蓂子)의 한자 뜻은 냉이의 효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석(?)은 나무를 깨서 나눈다는 뜻이고, 명(蓂)은 어둡다는 뜻이다. 눈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을 깨서 없앤다는 의미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냉이 씨의 효능은 좀 더 구체적이다. ‘청맹목통(靑盲目痛)하여 사물을 볼 수 없는 질환을 치료한다’고 쓰여 있다. 청맹목통은 녹내장의 전형적 증상으로, 겉으로 보기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고 통증이 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의학은 녹내장이 방수의 흐름이 나빠지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방수는 수정체와 각막 사이에 흐르는 눈 속의 눈물로, 혈액에서 걸러져 나온 것인데 흐름이 나빠지거나 안구 속에 고이면 눈의 압력이 높아지고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저하시키고 통증을 일으킨다. 냉이는 물을 몸 밖으로 뽑아내는 이수나 이뇨 작용을 통해 녹내장을 치료한다. 특히 동네 어귀 냇가에 많이 자라는 큰황새냉이가 효험이 좋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석명자는 큰황새냉이를 말한다. 물가에 자란 것이 눈 속의 물을 빼내는 효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어린 순과·잎은 뿌리와 더불어 이른 봄을 장식하는 나물이다. 냉이국은 뿌리도 함께 넣어야 참다운 맛이 난다. 데워서 우려낸 것을 잘게 썰어 나물죽을 끓여먹기도 한다.
하지만 안질환이 문제가 아니었다. 숙종 재위 40년에 들어서면서 간질환은 악화일로였다. 난경에 ‘간이 병들면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숙종은 이런 증상을 그대로 보였다. 재위 40년 4월27일 실록은 “상의 환후가 7개월 동안 계속돼 증세가 백가지로 변해 부기(浮氣)가 날로 더해졌다”고 했다. 부종이 계속되자 선조의 증손으로 종친이었던 유천군 이정은 “성질이 강력한 약을 쓰면 안된다”는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수환(導水丸)’이라는 처방을 고집했다. 이 약이 크게 효험을 보이자 감탄한 숙종은 스스로 시를 지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여덟 달을 온갖 방술로 다스렸지만 한가지 환약으로 빠른 효험을 얻었네. 지극한 그 공로 내 마음에 새겨두니 종친에게 은총을 표하노라.”
유천군이 처방한 도수환은 대황, 목통, 견우자 등의 약재를 포함한 약으로 강력한 이뇨 효과와 대변의 관장 효과를 겸한 처방이었다. 이 약으로 큰 효험을 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숙종에겐 대소변을 제대로 못 본 게 가장 큰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일련의 치료 사실을 살펴보면 숙종의 주요 질병은 간질환이었으며, 그 범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됐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은 재위 45년 10월 아들 연령군이 사망하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46년 5월에는 간경화 말기 증세인 복수가 차올랐다.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성상의 환후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 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지니, 온 조정과 백성(中外)들이 근심하고 두려워 하였다.”
이후 한달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두창과 인두법
숙종의 목숨을 빼앗은 병이 간질환이라면 그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질환은 조선시대 민중을 무척이나 괴롭힌 두창(痘瘡·천연두)이다. 예부터 마마, 손님, 포창(疱瘡)으로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천연두(天然痘), 중국에서는 천화(天禍)라 불린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백세창(百世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백세창은 평생 한번은 겪어야 하는 전염병이라는 뜻으로, 한번 전염병에 걸려서 살아남으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면역의 기본원리를 우리 조상들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연두는 공기로 전파되는 바이러스(variola)가 일으키는 질환이다. 일단 감염되면 고열과 발진이 일어나고 두통, 구토, 몸살 증상이 수반되며 2〜4일이 지나면 얼굴, 손, 이마에, 이후에는 몸통에 각각 발진이 생긴다. 증상이 일어난 지 8〜14일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천연두에 대한 기록은 4세기경 진(晉)나라 의사인 갈홍이 의서에 상세히 기록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에겐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기록이 나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4세 이전의 영아 40〜50%가 두창으로 사망한다고 했다. 조선 후기엔 두창 치료법으로 인두법을 주로 썼다. 인두법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정약용이다. 어린 시절 두창을 앓다가 죽을 뻔한 데다 여러 아이를 두진으로 잃은 아픔 때문에 인두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청나라 강희자전에서 “모든 두즙(痘汁·천연두즙)을 코로 받아들여 숨 쉬면 (천연두가 빠져) 나가게 된다. 이를 신통한 종두법이라고 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질병을 내부에서 외부로 밀어내는 보편적 한의학적 논리에서 외부에서 내부로 심는 종두법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핵심은 두창의 딱지인 시료를 채취하는 방법이었다. 천연두의 고름인 두장(痘漿)을 직접 채취해 쓰는 법과 두창을 앓은 이의 옷을 입히는 법, 마마자국을 말려 가루로 만든 뒤 코로 빨아들이는 법 등이 있었는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는 습기 있는 두흔(痘痕·마마 자국)을 코로 빨아들이는 수묘법(水苗法)이 권장됐다.
이런 방법은 잘못하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묘를 만드는데, 좋은 묘를 구해서 도자기 병에 넣고 밀봉해 숙묘 단계로 변화시켜 사용한다. 이때 모든 책임은 의사가 짊어져야 한다. 그러자 시중에선 갖가지 황당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종두에 적합한 계절과 날짜, 시료채취용 아이의 선택방법이 따로 있으며, 이를 잘 정해야 만일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의 인두법이 분명히 효과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허준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도 두창이 있다. 일개 의관에 불과한 허준이 어의 양예수를 제치고 선조의 총애를 받은 것은 광해군의 두창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두창을 과감한 처방으로 치료하자 선조는 그를 일약 당상관에 제수했다. 허준은 그 이전까지 두창 증세와 기존 전염성 질환의 증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창이라는 이름을 정확한 병명으로 분리해 공식적인 의학용어로 확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