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11-27 11:19
제 목
조선왕조와 한의학 고종 – 002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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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을 임산부에게 처방할 땐 기와 혈이 부족한 상태라는 진단을 내린 경우에 해당


민승호 죽음 이후 불면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 종손인데 민유중은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혈혈단신도 아니었다. 또한 국혼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편모 슬하의 외동딸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민치록은 10촌 형제가 되는 민치구의 둘째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와 친누나, 동생 사이였다. 중종반정 이후 노론의 사대부들이 국혼을 놓치지 말자고 했던 만큼 흥선대원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며느리를 들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종 8년 11월4일 명성황후는 원자를 낳았지만 원자는 항문이 막혀 죽고 만다. 실록의 기록은 간결하다. “오늘 해시(亥時)에 원자가 대변이 통하지 않는 증상으로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산실청(産室廳·조선시대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을 철수시키도록 하라.”
호사가들은 이런 원자의 불행이 흥선대원군의 음모로 산삼을 먹인 결과 나타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태아에게 항문이 형성되는 시기는 임신 10주 이내인데, 명성황후가 산삼을 먹은 시기는 그 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신 맥(脈)이 나타나 임신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시기는 임신 6~7주가 지나서이며, 입덧은 아무리 빨라도 5주 정도 지나야 나타난다.
한의학에서 산삼과 성분은 비슷하지만 약효는 훨씬 떨어지는 인삼을 임신부에게 처방할 땐 기와 혈이 부족한 상태라는 진단을 내린 경우다. 팔물탕이란 약제를 처방하는데, 인삼을 비롯해 백출, 백복령, 감초, 숙지황, 백작약, 천궁, 당귀 등의 약재가 들어간다. 인삼을 단독 처방하면 해로울 수 있지만, 8가지 약재가 혼합되면 인삼은 기와 혈을 조절하는 구실을 한다. 물론 임신기간 중 온몸에 열이 나고 축축해지는 ‘습열(濕熱)’ 상태의 증상엔 인삼을 처방해선 안된다. 인삼이 임신부에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임신시엔 함부로 먹어선 안되는 약재다.
아무튼 민승호의 죽음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 못들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잠이 오지 않는 원인 중 가장 큰 건 역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교감신경을 흥분시키고 혈압을 오르게 하며, 위가 아프고 얹히는 등 열을 받는 상황으로 만든다. 결국 인체엔 양기가 넘치면서 음기가 줄어 불면상태가 된다. 커피, 콜라 등 음료수도 신경을 흥분시키고 잠이 오지 않게 한다. 현대의학에서 보면 갱년기나 갑상선질환, 당뇨, 협심증은 음기를 소진해 불면증을 야기하는 원흉이다.
잠들기 힘들어하던 고종이 승하하던 날 점심 때까지 처방된 약물도 온담탕이다. 온담탕 속 대표 약물은 반하(半夏)다. 반하는 보리밭에서 많이 자란다. 속이 더운 까닭에 보리밭 사이에 숨어 해를 피해 자라며 보리농사가 끝나 쟁기질할 때 캐낸다. 속이 더운 식물이 어떻게 잠을 잘 오게 할까. 답은 그 이름에 담겨 있다. 반하는 하지까지는 잎을 펼치지만 이후론 잎을 반으로 줄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반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하엔 양이 불타오르는 걸 줄여 음으로 보내는 오묘한 특성이 내재한다. 이는 양을 이끌어 음으로 보낸다는 ‘도양입음(導陽入陰)’으로, 양을 이끌어 음을 활달하게 한다는 뜻이다. 현대의학으로 보면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잠이 오게 하는 것이다.


반하와 산조인
온담탕에 가미하면서 잠이 잘 오게 하는 대표적 약재는 산조인(酸棗仁)이다. 산조인은 TV 드라마 ‘대장금’에도 등장해 유명해졌다. 중국 사신이 와서 장금에게 수청을 들게 하자 그에게 먹여 잠재운 약재다. 대추나무 종류인데, 크게 자라는 건 대추이고 빡빡하고 작게 여러 개가 자라는 건 산조인이다.
산조인은 신맛을 지녔으며 간을 보한다. ‘본초강목’은 그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누우면 피는 간으로 간다(간은 근육을 주관하기에 사람이 활동을 그치면 피는 간으로 돌아오고 활동하면 근육으로 스민다). 피가 안정되지 못하여 누워도 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놀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자지 못한다.”
이 점도 음기와 통한다. 간장으로 수렴하는 건 혈액이며, 음기다. 산조인의 산(酸)은 신맛으로 수렴한다는 뜻이다. ‘동의보감’에서 사과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해가 떠오르면 환해지면서 만물이 깨어난다. 반면 달이 뜨는 밤이면 사물을 밝히던 빛은 흐려지기 시작해 이내 어두워진다. 태양은 밝은 양기를 주관하고, 달은 어둡고 서늘한 음기를 주관한다. 잠은 달과 같은 음기가 성할 때 잘 오고 음기가 줄면 오지 않는다. 동의보감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음기가 줄어 들어 양기가 성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잠을 잘 오게 한다고 알려진 건 상추다. 상추는 본래부터 음기의 상징이다. 여성의 욕망을 가리킨다. 상추의 속명은 은근초다. 숨어서 불태우는 음욕과 연결되는 말이다. 고추밭 이랑 사이에 심은 상추일수록 약이 올라 상품으로 잘 자란다고 하며 텃밭에서도 보이지 않게 파종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욕할 때 ‘고추밭 상치 가리는 년’이라고 하면 곧 남편을 위하는 척하며 자신의 음욕을 채운다는 나쁜 의미가 숨어 있다. 본초강목에서 상추가 신장에 좋다고 한 것엔 내부의 음액을 도와 정액을 잘 만든다는 뜻이다. 속이 찬 사람이 먹으면 설사를 하게 된다.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