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의사들의 삶이 최근 지상파를 통해 재조명된 가운데 삶의 터전에서 묵묵히 헌신한 한의사의 업적이 관심을 끌고 있다. 경술국치 당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부 한의사는 저명한 소설가의 친·인척이거나 종교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의 든든한 버팀목의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한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한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에는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주권을 되찾으려고 한 한의사들의 사투가 나와 있다.
◇천도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인으로도 활약
일제강점기 시절 일부 한의사는 한의업과 독립운동 외에도 천도교, 불교 등에서 활약하며 격동하는 근대사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광희·변태우·정구용 선생 등이 있다.
1892년 함경북도 학성에서 태어난 김광희 선생은 1922년 7월 고려혁명위원회 해외조직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11월 천도교 신·구파간 내분 수습을 위해 신파의 포조 대표위원으로서 협의를 성공시켰다. 1930년에는 한족총연합회의 지도당으로 조직된 신한농민당 위원장으로 헌신했다. 이 같은 공로로 정부는 김광희 선생에게 195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애국장을 수여했다.
천도교 신도이기도 했던 변태우 선생은 1939년부터 신문·라디오 등 대중매체가 일본의 전과를 과대 보도하는 데 불만을 품고 일본의 불공정한 보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일제는 1940년 제주도에 중국을 겨냥한 발전 기지를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으로 천주교회 신도 조직을 탄압 대상으로 삼았고, 변태우 선생은 1941년 10월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국가보안법 및 국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국이 광복한 후 광주 시내에 개원하며 지내다 1950년 고문의 여독과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광주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정부는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정구용 선생은 1918년 제주도 서귀포시의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3·1 운동보다 5개월 먼저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전국 최대의 무장항일운동이다. 당시 주지 김연일과 함께 ‘반일 반외세’를 기치로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한 후 민족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봉기를 주도했다. 제주도내 일본 관리와 상인을 내쫓기 위해 마을주민 등 700여 명이 행동에 나섰다. 1923년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은 정구용 선생은 출소 후 경북 포항의 보경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정부는 2002년 정구용 선생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다.
◇저명 문학인의 친척이거나 소설에 등장하기도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의사들은 저명한 문학인의 친척이거나, 유명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시인 이육사의 외삼촌으로 알려진 허발 선생 외에도 나병규·조헌영·유경집 선생이 있다.
1919년 강원도 철원 애국단에 지원한 나병규 선생은 서울 상동교회를 통해 알게 된 대한독립애국단 단원 조종대 선생의 활동을 도왔다. 신현구 선생 등이 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 충청, 전라도 등지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조종대 선생이 지부 설치에 힘을 쏟을 때 나 선생은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연락 거점을 등을 제공했다. 소설가 나동향의 조부이기도 하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 선생은 일본 와세다 대학 사법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조선유학생 학우회장, 신간회 동경지회장 등을 지내면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와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에서 사무차장을 역임하고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의 제도권 진입을 위해 노력했다. 경상북도한의사회는 1988년 5월 타계한 조헌영 선생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만큼 친분이 두터웠던 유경집 선생은 1909년 아들 유동하와 안중근 의사 등 7명이 모여 구국 혁신을 맹세하는 ‘7인 동맹’을 조직했다. 자신의 아들 유동주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러시아 통역을 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유경집 선생은 고향 원산을 떠나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살다가 옴스크시를 거쳐 혁명 직후 폴란드로 이주했다. 유경집 선생은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 ‘불멸’에서 안중근을 돕는 인물의 모티브가 됐다. 소설에서 유경집은 안 의사에게 “얼마 되지 않지만, 군자금에 보태 쓰도록 해 달라”며 적지 않은 돈을 쾌척했다.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된 한의사도 있다. 1910년 경술국치를 겪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원직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담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 앞에서 조국독립에 자신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매각하는 등 다양한 공적을 남겼지만,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1945년 5월 광복을 3개월 여 앞두고 옥사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 외에도 정치인, 기업가, 교육가, 기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도 투신한 한의사들의 이력도 눈에 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일청 선생은 1926년 태극기와 격문을 6·10 만세운동 당시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기소됐다. 이후 일본 도쿄에서 ‘조선운동’ 기자로 활약한 뒤 한국에서 ‘중아일보’ 예천지국을 운영했다.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0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독립운동과 사회계몽운동, 한의사로서 사회에 기여한 한일청 선생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대됐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제약사를 세운 박성수 선생은 1920년 9월 독립운동에 가담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솔표 우황청심원, 위장약, 위청수 등 대표적인 한약을 개발한 박 선생은 설립초기 전국에 약재를 나르며 독립운동가의 편지를 함께 전달한 공로로 독립유공자에 선정됐다. 또한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의학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방주혁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시영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부탁을 받고 밀사 한웅을 민영식 선생과 만나도록 주선해 동대문 경찰서에서 문초를 받았다. 이후 46세 때 이시영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부통령이 된 이시영의 정치 고문, 민주당 최고위원 조병옥의 정치고문을 지냈으며 국제연합 사무총장에게 한국 가입 필요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로 업적을 쌓은 방 선생의 공적은 현재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로 등록돼 있지 않다.
앞서 KBS 1TV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다큐세상의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들, 한의사’ 편에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우규·신홍균·허발 선생 등 한의사 3인의 삶을 추적했다.
역사교육 ‘독립운동가’ 앱 개발자인 정상규 씨는 이들 한의사의 삶을 추적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한의사들의 독립운동을 발굴하며 한의학이 발전해온 원동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새로운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으로 역사의 숨은 주인공을 찾는 일은 계속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김남일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이 방송에서 “한의학은 역사적으로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그 동안 축적한 경험은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전 세계의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런 역사를 지닌 한의학과 접목된다면 새로운 의학을 만드는 데에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