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전(寢殿)이 궁인이 오가는 곳과 가까워 너무 시끄럽다. 나는 본래 마음병(心病)이 있어 소음에 더욱 민감하다. 그래서 거처는 반드시 소통되고 확 트인 곳이어야 한다.(중략) 심신이 편치 못할 때 조용히 요양할 곳이 없어 신책방(궁궐)을 그 옛터에 짓게 했다.”
광해군은 재위 2년에 새로 궁궐을 짓게 한 이유를 자신의 청각과민 증상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대 과학은 청각과민이 사람의 심리 상태와 깊게 연관돼 있다고 본다. 사람은 어떤 자극이 일으키는 물리적 반응 그 자체가 아닌 뇌의 수용기를 통해 형성된 표상과 신경시스템이 만들어 낸 느낌을 지각한다. 이것을 ‘표상의 원리’라 하는데, 같은 소리를 듣고도 사람마다 반응이 제각각인 이유도 그 때문. 요즘 부쩍 이슈가 되는 층간소음 역시 청취자의 심리적 불안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실제 광해군도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세자 시절인 임진왜란 과정에서 겪은 심적 피로는 의약으로 쉬 치유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선조 때 주부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진 유대조(兪大造)의 상소(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겪은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때 산길이 험준해 일백리 길에 사람 하나 없었는데,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해 노숙하였으니 광무제가 부엌에서 옷을 말린 때에도 이런 곤란은 없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비를 맞으면서 끝내 모두 온전하게 했으니 참으로 고생스러웠습니다. 험난한 산천을 지나느라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광해군은 그 후유증으로 1593년 봄과 여름 동안 해주에 머물며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구중궁궐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왕손에겐 산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여기에 임진왜란 후 벌어진 왕위 계승 문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해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더했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 등 형제들과 왕위쟁탈전에서 벌어진 서인들과 인목대비의 노골적 질시와 저주는 그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16년 공들여 온 왕세자 자리가 무너질 듯한 상실감에, 광해군은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스트레스로 인한 청각과민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광해군은 재위 7년, 왜란으로 불탄 창경궁을 중건해 놓고도 “궁내의 대조전이 어둡고 유령이 나올 것 같다”며 가기를 꺼렸다. 도망가듯 다른 궁궐로 자주 옮겨 다니곤 했다. 이 때문일까.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짓는 데 국력을 낭비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잦은 토목공사와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인조반정의 빌미가 됐다. 청각과민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정권 차원의 문제로 발전됐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광해군을 임진왜란 때부터 따라다니며 평생 치료했던 의관은 허임이었다. 그는 이미 400여 년 전 쓴 저서 ‘침구경험방’을 통해 귀의 질병을 마음과 연결시켰다. 심장 뒤편 등에 있는 심수자리와 손목 정중앙 2촌 위에 있는 내관혈에 뜸을 놓았다. 이들은 심장의 혈류를 조절해 열을 내림으로써 흥분된 마음을 다스리고 귓속을 맑게 해 주는 경혈이다. 같은 원리로 이명과 청각과민에 효과를 발휘하는 약물로는 으름덩굴이 있다. 한자로는 목통(木通)으로, 실제 줄기의 목질부에는 시원하게 구멍이 뚫려 막힌 혈맥을 뚫어주는 소통력을 상징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