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지역 특산품을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제도가 있었다. 중국에서도 사라진 불편한 이 제도를 조선이 끝까지 고집한 것은 군주와 백성이 한 가족처럼 살겠다는 조선 특유의 가족주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백성들은 어버이 같은 군주가 먹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특산품을 진상했다.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 백성들은 진상제도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최고는 전복이었다. 정조 때 기록을 보면 한 해에 제주도 821개, 전라도 450개, 충청도 300개, 경상도 170개 등 총 1741개가 진상됐다. 세조 때 중추원사였던 기건(奇虔)은 제주 백성들이 전복 진상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선조실록에는 당시 해안가 백성들에게 전복 진상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나온다. “진도(珍島) 사람으로 왜구에 잡혀가 정착한 사화동(沙火同)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붙잡혀온 조선 포로에게 ‘조선은 부역이 매우 고되고 대소(大小)의 전복을 한정 없이 징수하여 감당할 길이 없으니, 이곳에(일본에) 그대로 거주하라’고 설득했다.” 전복 진상 때문에 조국을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숙종 때 전라도 진도군의 김서(金瑞) 등 아홉 사람은 진상할 전복을 캐다가 바다에서 표류해 2년여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태풍을 만난 이들의 배는 17일 만에 유구국(오키나와)에 닿았지만 조선으로 가는 배가 없어 청나라 복건성으로 보내졌다가 북경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왔다.
조선의 임금은 성군이 되기 위해서 항상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왕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도 음양의 균형을 맞췄다. 전복은 임금의 밥상에서 음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을 마시면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불끈 힘이 솟는 것처럼, 과열된 장기를 서늘하게 진정시켜 원기를 회복시키는 작용을 한다.
문종은 전복을 직접 손질해 아버지 세종이 드시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효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 일종의 치료처방이었다. 세종은 당뇨와 안질을 심하게 앓았는데, 한의학은 소갈증(당뇨)의 근본 원인을 몸에 숨은열이라 여겼고, 안질도 불의 통로인 눈에 쌓인 과도한 열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인조는 큰아들인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원기를 차리지 못하고 병으로 앓아눕자 생전복을 그곳까지 보냈다. 황해도에서 잡은 전복이 심양까지 갈 때 상하지 않도록 각 고을 수령들은 얼음을 교체해 채워가면서 무사히 가져다 바쳤다.
본초강목에는 전복을 ‘오미 중 신맛이 강해 간의 열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뛰어나다. 눈을 밝게 하고 고혈압을 진정시키며 열로 인한 어지러움, 이명 증상에도 도움이 크다’고 쓰여 있다. 탄산칼슘이 많이 든 전복 껍데기도 간의 열을 잘 내려 어지럼증이나 시력장애, 이명에 특히 좋다고 알려져 있다. 눈이 피곤할 때 전복 껍데기 20g과 감국 20g을 물 150mL와 함께 넣어 물이 절반 정도 될 때까지 졸인 뒤 식후에 2, 3번 먹으면 도움이 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본초강목에는 전복을 ‘오미 중 신맛이 강해 간의 열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뛰어나다. 눈을 밝게 하고 고혈압을 진정시키며 열로 인한 어지러움, 이명 증상에도 도움이 크다’고 쓰여 있다. 탄산칼슘이 많이 든 전복 껍데기도 간의 열을 잘 내려 어지럼증이나 시력장애, 이명에 특히 좋다고 알려져 있다. 눈이 피곤할 때 전복 껍데기 20g과 감국 20g을 물 150mL와 함께 넣어 물이 절반 정도 될 때까지 졸인 뒤 식후에 2, 3번 먹으면 도움이 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