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나 선풍기도 없고, 얼음이 귀했던 조선시대, 조상들은 고작해야 바람이 부는 나무그늘 아래 멍석을 펴놓고 누워 쉬는 게 피서의 전부였다. 부잣집 양반들은 물에 넣어 시원하게 만든 수박을 먹으며 더위를 달랬다. 서역에서 들어왔다 해 서과(西瓜)로 불렸던 수박은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리는 주요 하사품 중 하나였다. 수박 마니아였던 연산군은 중국에서 수박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막아섰다는 이유로 장령 김천령을 부관참시했다.
조선시대 왕들은 몸에 열이 많았다. 더워서 생기는 병인 서증(暑症)을 많이 앓았다. 서증은 ‘여름을 탄다’는 의미의 주하병(注夏病)으로도 불린다. 동의보감은 “서증은 상화(相火)에 의해 생기는데 심한 갈증과 답답증, 열, 두통, 어지럼증, 다한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밝힌다. 상화는 지금 말로는 스트레스라 할 수 있는데 화가 많은 체질의 사람들은 서증에 걸리기 쉽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자책감과 치욕으로 상화가 극심했다. 인조 23년 의관들은 “임금께서 서증과 설사의 증후가 있다”며 생맥산(生脈散)을 처방했다. 다음 해 인조는 “서증이 여름만 되면 재발해 복부가 몹시 뜨겁고 의대(衣x)를 착용하면 배 속이 불편해져 바로 설사가 나니 반드시 옷을 열어젖히고 찬 기운을 쐬어야 편안해진다”고 호소했다.
영조실록에는 서증의 예방과 치료법이 잘 나와 있다.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민진원은 “전하께서 심한 갈증과 열증을 달래기 위해 때때로 얼음차(氷茶)를 드시는데 잠깐은 상쾌하고 시원한 것 같지만 몸에는 지극히 해롭습니다”라며 찬 음료를 서증의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자 영조는 “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근래에 갈증이 너무 심해져 참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도승지 홍석보는 “북경(北京) 사람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뜨거운 물을 마시기 때문에 기침, 가래가 없다고 합니다. (더워도) 따뜻한 물을 드시는 게 몸에 좋습니다”라고 진언한다.
조선 왕실은 내빙고에서 만든 얼음으로 여름에도 항상 빙차를 즐겼다. 민진원과 홍석보는 비록 문신이었지만 서증의 근본 치료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동의보감에는 “여름철에 찬 음식이나 얼음물을 너무 많이 먹어 비위(脾胃)가 상하면 토사곽란 증상이 생긴다. 비위를 따뜻하게 하고 음식물을 잘 소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밝힌다.
가을이 오면 인체는 외부의 찬 기운에 대응해 36.5도로 체온을 유지하는 보온모드에 들어간다. 여름의 열기를 흡수해 가을을 대비한다. 하지만 여름에 냉기만 접한 현대인들은 가을이 되면 폐가 약해져 감기나 기침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더워도 찬 음료와 에어컨 바람을 줄여야 여름도 건강하게 나고 가을 비염과 겨울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서증 예방에 ‘하고초(夏枯草)’로 불리는 익모초를 사용하기도 했다. 몸의 열기를 가라앉히는 작용을 해 여름이 오기 전 유둣날(음력 6월 15일)에 짜서 먹는 풍속이 있었다. 중국 측천무후는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익모초를 갈아서 팩으로 사용해 미모를 유지했을 정도로 열을 내리는 작용이 뛰어나다.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