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항문을 점잖게 ‘백문(魄門)’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의 하수구’ 정도로 풀이된다. 쾌변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말이다. 조선 제20대 왕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을 잃고 생긴 트라우마를 치료할 때 대변이 잘 나오게 하는 ‘대황’을 처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은 무엇보다 대변 상태에 주목했다. ‘매화틀’이라는 변기에 대변을 받아 관찰하고 질병 발견과 치료에서 도움을 받았다. 승정원 일기에는 내의원이 대변 색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해 모양과 느낌까지 일일이 기록했다. ‘대변 장리(長利)’라는 표현은 임금의 대변이 길고 장이 편하게 보였다는 뜻으로 왕의 배설은 ‘방하(放下)’라고 했다.
조선 임금도 변비로 고생했다. 가장 불행한 사례는 대변이 장을 막아 태어난 지 4일 만에 숨진 고종의 첫째 아들이다. 실록은 “오늘 해시(亥時) 원자가 대변이 통하지 않는 증상으로 불행을 당했다. 산실청을 철수시키도록 하라”라고 기록했다. 일부 호사가들은 “원자가 항문이 생기지 않은 채 태어났다”고 했지만 기록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어의들은 아들의 상태를 묻는 고종에게 ‘환변지침’이라고 답했다. 환변지침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모시겠다’는 뜻으로 실제 항문이 없었다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원자에게 산삼을 많이 먹여 장이 막히게 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는 음모론일 뿐이다. 산삼이 대장의 열을 올려 변비가 생겼다는 주장인데 산삼은 단 4일 만에 장을 막히게 할 만큼 급한 증상을 만들지 못한다.
변비로 가장 고생한 왕은 중종이다. 중종의 변비는 대장금이 치료했다. 대장금은 중종 10년(1515년) 3월 목숨이 경각에 놓인 원자(12대 인종)를 살리며 실록에 등장했는데 이후 29년 만인 1544년 10월 중종의 변비를 극적으로 치료했다고 다시 나온다. 중종은 “내 변비 증세는 여의(대장금)가 안다”고 했다. 대장금은 여러 처방으로도 변비가 쉽게 낫지 않자 극적인 처방을 내렸다. 바로 밀정(蜜釘)을 이용해 한 번에 중종의 변비를 치료한 것. 밀정은 꿀과 조각자를 섞어 만든 고전적 관장 처방으로 대장금이 중종의 관장을 직접 한 것으로 미뤄 임금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숙종도 변비로 크게 고생했지만 어의들은 밀정 같은 강한 약의 처방을 주저했다. 혹시라도 발생할 부작용에 따른 처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종친인 유천군 이정은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수환(導水丸)’의 처방을 고집했다. 이 약이 크게 효험을 보이자 숙종은 스스로 시를 짓고 공로를 치하했다. “여덟 달을 온갖 방술로 다스렸지만 한 가지 환약으로 빠른 효험을 얻었네. 지극한 그 공로 내 마음에 새겨두니 종친에게 은총을 표하노라.” 도수환은 대황, 목통, 견우자 등으로 만든다. 견우자는 나팔꽃 씨앗이다. 조선 왕들은 쾌변을 위해 들깨나 백자인(측백나무 씨앗) 등 식물성 기름이 많은 식재료를 죽으로 만들어 먹었다. 중국 명나라 약학서인 본초강목은 변비에 좋은 식재료로 좁쌀과 차조, 메밀, 보리, 쇠비름, 토란, 시금치, 상추, 배추, 죽순 등을 추천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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