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4-07-01 11:41
제 목
조선 왕조와 한의학 - 태종(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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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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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 중심의 권력 재편을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1367~1422, 재위1400~1418)은 어떤 체질이었을까.

TV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역을 맡았던 탤런트 유동근의 후덕한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조 3년 6월1일, 정안군 이방원은 조선에 대한 명나라 황제의 의구심을 풀려고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길을 탈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격변의 건국현장을 누비면서 정몽주와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살육한 태종은 의외로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격은 강명(剛明)했다. ‘강’은 성격이 칼처럼 날카롭다는 것이고, ‘명’은 머리가 명철했다는 이야기다. 태종이 현직에서 물러난 세종 2년 10월28일의 기록에 강명하다는 말이 나온다.

태종, “금년에는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일찍이 의원 원학(元鶴)이 상왕전(上王殿)에 시종하였으므로 상왕이 종하가 의술에 매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또 양홍달(楊弘達)이란 의원이 너무 늙었으므로 종하로 하여금 원학과 더불어 번갈아 입직하게 하려고 원학을 보내어 종하를 부르니 종하가 상왕의 강명(剛明)함을 꺼려서 가까이 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자신할만한 경험이 없다하여 나가지 아니하니 원학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불렀으나 또 가지 않으므로 곧 의금부에 내려 신문한즉 종하가 말하기를 ‘상감께서 명철하오신데 만일에 방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하였나이다’하므로 곧 대역으로 논죄하여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실록의 기록에서 진료하길 꺼렸다가 참형에 처해진 유일한 의원이 바로 정종하다. 명철하면서 고금의 서적에 능통했던 태종의 지적 능력은 여러 차례 의학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의원들 공부 좀 더해라’는 오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태종 15년 11월16일 궁중에서 여남은살 되는 아이가 병이 나자 조청이라는 의원이 약을 지었는데 그게 어른 분량이었다. 

소아의 약은 성인 분량의 반만 짓게 돼 있으므로 소아를 몇 살까지로 규정하는지에 대해 묻자 조청은 6세까지를 소아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천금방’이란 책을 찾아 2, 3세를 영아라 하고 10세까지를 소아(小兒)라 하며, 15세는 소아(少兒)라고 구분한다는 대목을 직접 보여주면서 소아의 범위와 약 사용량에 관해 조청을 굴복시켰다.

파고지(破古紙)는 ‘동의보감’에서 신장의 기능이 떨어져 정액이 절로 나오고 허리가 아프며 무릎이 차고 음낭이 축축한 증상을 치료하는 성기능 개선 약재다. 이름 자체가 ‘오래된 문창호지를 뚫는다’는 뜻을 지녀 벽지와 착각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은 도벽지(塗壁紙)를 파고지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으니 의학자들이 약방서에 밝지 못하다고도 지적했다. 왕권을 강화해 국가 이성이 되기를 원했던 태종은 궁중생활을 좋아했을까. 

태종 2년 9월19일의 기록은 궁중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는지 잘 보여준다. “금년에는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의사 양홍달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 외출하지 아니하여 기운이 막혀 그런 것이니 탕욕(湯浴)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간관(諫官)들은 왕에게 지지 않고 온천행을 반대한다. 태종의 반응은 그의 성격을 다시 한번 잘 드러낸다.

“간관들이 ‘전하는 춘추가 젊어서 반드시 병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20~30세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병이 없는가. 간관이 내병의 치료를 못하게 막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 

온천행을 포기하면서 강무(講武)를 가겠다고 하자 간관들은 다시 왕의 강무를 막는다. 강무는 사냥을 통해 무예를 익히는 행사인 만큼 말달리기를 포함하는데 태종은 말을 과격하게 몰아 속력을 내는 스피드광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말미에 조영무가 나서서 신하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여러 아랫사람이 사냥을 안했으면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풍질이 있었는데… 재위 8년 후 병에 시달려

태종 8년의 기록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입증한다. “태상왕이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었는데 임금이 이때에 침구의 잘못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곧 편복으로 대궐동쪽 작은 문을 나와 말을 달려가니 시위(侍衛)하는 자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실록은 태종즉위 13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병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앞에 자신이 지목한 종기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 외에 주목할 만한 질병 기록이 없다. 태종은 재위 8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병이 나기 시작한다. 세자에게 문소전의 제사를 대행하게 하고 날씨가 음산해지자 약주를 정지하게 하는가 하면 고기반찬을 먹도록 청하기도 한다. 13년 8월11일 기록에선 자신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내가 본디 풍질이 있었는데 근일에 다시 발작하여 통증이 심하다. 지난 밤에 조금 차도가 있었으니 경들은 우려하지 말라.” 

태종은 풍질 증상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이를 구체적으로 호소한다. 같은 해 11월6일 “임금의 손이 회복되지 않아 활을 잡기가 어렵다고 하였다”거나 세종 1년 4월29일 “오른팔이 시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것에 차도가 있어 속히 돌아갈 것을 명했다”는 구절도 있다. 세종 1년 5월5일엔 상왕이 목이 뻐근하고 아파서 돌아가는 길에 관원들이 나타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애간장을 태우는게 풍의 원인이 된다”

태종의 풍질 증상을 종합하면 지금의 목디스크와 유사한 질환이다. 풍질에서 풍은 어떤 의미일까. ‘황제내경’ 태소(太素)의 28권 제풍수류에 보면 ‘바람은 기(氣)와 하나인데 빠르고 다급하면 풍이 되고 천천히 질서가 있을 때는 풍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에서의 대기와 인체 내부에서 흐르는 원기가 그것이다. 자연의 대기가 풍이 되면 감기 증상을 유발해 오한 발열하는 것이고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면 뇌혈관질환이나 관절염 등 풍병을 발병케 한다. 예전엔 명의의 자질을 바람을 잘 관찰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전설적 명의였던 편작(扁鵲)의 작(鵲)은 까치작이다. 까치는 집을 지을 때 그해 불어올 바람을 예상해 짓기 때문에 나뭇가지 끝에 지어도 바람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편작은 바람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고, 여기서 바람의 원형은 기로써 기의 흐름을 잘아는 사람이 명의라는 뜻이고 보면 한의학의 본질과 잘 맞아 떨어진다.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어 풍질이 생겼다면 어떤 원인으로 풍이 생겼고, 어떤 장부와 관계가 있을까. 난경(難經)에선 풍은 간과 관계 있으며 끈기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화를 자주내고 기가 흥분해 가라앉지 않으면 간의 혈이 허해지면서 신경통 신경마비 오십견 등의 절육통(節肉痛)이 생긴다고 경고했다.

애간장을 태우는게 풍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다. 태종은 자신이 국가 이성으로서 국가의 생존강화라는 큰 목적을 위해 형제, 처가, 사가(私家) 모두에게 피를 뿌린 인물이다. 이 때문에 개인이 겪어야할 인간적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태종 16년 5월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며 보낸 전지에는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무인(戊寅)·경진(庚辰)·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형제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음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가뭄을 하늘이 주는 벌로 생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부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격정적 토로다. 
 
이상곤 원장(서울 갑산한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