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01-07 12:25
제 목
조선 왕조와 한의학 12 - 명종(1)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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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을 괴롭힌 심열증의 뿌리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
면역력 약했던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의 압박에 건강 잃어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1515~ 1545, 재위 1544~1545)과 제13대 왕 명종(明宗·1534~1567, 재위 1545∼1567)의 어머니로, 중종의 계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공신들은 중종과 그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를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다.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으로 반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겪은 불행이다. 

중종의 둘째 부인은 장경왕후인데,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출산한 아이가 인종이다. 장경왕후의 출산을 도운 이는 TV드라마로 유명한 장금이다. 셋째 왕비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제였던 문정왕후다. 두 딸을 낳은 그는 결혼 17년만인 중종 29년에 훗날 명종이 되는 왕자를 생산했다. 문정왕후는 인종과 명종 두 왕의 건강과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친아들인 명종은 문정왕후의 압박에 건강을 해쳤다.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上·임금)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 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권력잡은 문정왕후, 대립세력 제거한 ‘을사사화’

죽는 순간까지 명종을 괴롭힌 심열증의 뿌리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4월 20일 명종이 지시해 만든 공식문서는 사뭇 다르다. “인종이 원자로 있을 때 부지런히 애써 무양(撫養·어루만지듯이 잘 돌보아 기름)함이 자기 소생보다 더 나았다. 항상 인종의 학문이 날로, 달로 진취함을 기뻐하여 유모·보모, 시인(侍人)의 무리에게 자주 상을 주었다. 인종과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겼고, 공주의 자제에 이르러서도 모든 일을 일체 공주의 예에 의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문정왕후는 두 번이나 공주를 낳은 끝에 결혼 17년 만에 명종을 낳는다.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누르고 쓴맛 단맛을 보며 권력의 속성으로 앞날을 파악한 여장부다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문정왕후는 권력을 잡자 자신과 대립했던 대윤파를 일소했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양재역 벽에 대자보 성격의 글이 게시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其書以朱書曰: “女主執政于上, 奸臣李 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그 글은 붉은 글씨로 썼는데,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주는 여왕의 권력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이 사건으로 중종과 희빈홍씨 사이에 난 인종과 명종의 이복형제 봉성군 이완이 사사(賜死) 당한다. 

인종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의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명종 즉위년 7월 27일 인종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됐다. “왕의 성품이 엄중하여 평소 한가롭게 소일할 적에도 조용히 침묵하면서 희롱하는 말이 없었고,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을 외형에 나타내지 않았고, 좌우의 근시(近侍)들에게도 일찍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며, 혹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좋아하지 않는 빛이 있었다.…성색(聲色·음악과 여색(女色)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종, 생강 상시 복용… 내부 탁한 악기를 없애

공자는 ‘논어’ 향당편에서 자신의 식생활 습관을 밝히면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생강이 정신을 소통하고 내부의 탁한 악기를 없앤다고 주석을 달았다.

인종은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조선 전기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의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 “내가 ‘논어’에 공자의 음식에 대한 절도를 기록한 것을 보니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소통시키고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은 공자를 사모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말단인 음식 같은 것에서도 반드시 법을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채소를 글 선생인 시강원 궁료에 보내는 것이니, 한번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운 생강을 선물하며 극단의 공자 따라잡기를 한 것이다.

인종은 사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극단적으로 효심을 발휘했으며 도학자로서의 금욕정신을 실천한 반면, 연산군은 처용무라는 탈춤을 추고 백모를 겁간하면서 소의 태(胎)를 먹는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극단적인 도덕성도, 극단적인 쾌락도 건강을 해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사가 확인해 준 셈이다.

실록은 인종의 효심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됐음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별다른 질병이 없었다. 자신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죽음을 슬퍼해 초췌해졌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왕이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에서 졸곡(卒哭·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까지 죽만 먹고 염장(鹽醬)은 먹지 않았으며 밤에 편히 자지 않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상차를 떠나지 않았다. 왕이 시질(侍疾) 초두부터 초췌함이 너무 심하였는데, 대고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철골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지경이었으므로 대신이 선왕의 유교를 들어 아뢰면서 권도를 따라 육선을 진어하라고 청하면, ‘나의 성효가 미덥지 못하여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하면서 더욱 애통해하였다.” 

병이 더욱 악화된 것도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인종의 재위기간은 8개월이다. 인종 1년 윤(閏) 1월 1일부터 약방제조와 의원들은 계속해 진찰을 받고 약을 쓸 것을 건의 하지만 거절당한다. 1월 9일 “심폐와 비위의 맥이 미약하고 입술이 마르고 낯빛이 수척하며 때때로 가는 기침을 했다. 정부 및 육조·한성부가 아뢰기를, “상의옥체가 매우 피곤하고 비위가 미약하십니다”라면서 세종의 경우처럼 고기반찬을 먹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종은 1월 29일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고 되레 반문한다. 실록은 인종이 정말로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기록했다. 인종 1년 6월 25일 이질(설사) 증세가 시작되면서 증세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상의 증세는 대개 더위에 상한데다 정신을 써서 심열(心熱)하는 증세로 매우 지치셨는데, 약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심하여 광증을 일으키실 듯합니다.”

명종, 원기 충실하지 못해 오래도록 素膳 멀리해

7월1일 인종은 세상을 떠난다. 하루 전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성리학의 메시아답게 죽은 조광조를 잊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 비원을 윤임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현량과를 부용(復用)하는 일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유한이 없지 않다.”

야사는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떡을 주어 독살했다고 전한다. 6월 18일의 기록은 이렇다. “상이 경사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지내고 자전(慈殿)에게 문안하였다. 자전이 수가(隨駕)한 시종·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주머니를 내렸다.” 같은 날 실록은 야사의 추측에 힘을 보태는 기록을 남겼다. “인종이 이날 이후 원기가 끊어지고 병세가 심해져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는 자신의 운명할 날이 다가오자 명종의 체력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언을 남긴다. “주상은 원기가 본래 충실하지 못하여 오래도록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지 않은 반찬)을 들 수 없으니, 모든 상례(喪禮)는 모름지기 보양하는 것을 선무로 삼아 졸곡까지 기다리지 말고 모든 방법을 써서 조보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이오.”
 
이상곤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