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5-04-07 14:45
제 목
조선 왕조와 한의학 - 인조(3)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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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인조 말려 죽인 ‘저주病’
원기 부족 탓 정신질환… 귀신 쫓는 돌팔이가 병 키워
 
“사람이 헛것에 들리면 슬프지 않은 일에도 슬퍼하고, 마음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정신이 산란해 늘 술에 취한 것 같고 미친 말을 하며 놀라거나 무서워 한다. 벽을 향해 슬프게 울기도 한다. 꿈에 헛것과 성교를 하고(房事), 가위에 잘 눌린다. 추위와 더위가 매시간 반복하며 명치끝에 꽉 찬 느낌이 들고 숨결이 가빠오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이것은 모두 정신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헛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원기가 극도로 허약해진 때문이다.”

원기를 보충하는 방법도 건강상식에 준한다. 현대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원기가 모자랄 때는 음식물로 보충한다. 쌀, 고기, 과일, 채소 등 여러 가지 음식물은 모두 몸을 보호한다. 약은 눅눅하고 찐득한 것을 쓴다. 녹각교, 아교 조청, 졸인 젓, 꿀, 인삼, 행인, 당귀, 숙지황 등을 쓴다.”

하지만 동의보감은 일반인의 믿음을 인정하면서 사수를 질병으로 보는 견해도 기록했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어서 3년이 지나면 혼신(魂神)이 풍진(風塵)이 된다. 그것이 사람에게 달라붙으면 병이 된다. 대체로 헛것을 낀 사기(邪氣)가 온몸에 돌면 오한과 신열이 나고 땀이 비 오듯 하며 정신이 착잡해진다. 여러 해가 지나면 점차 심해져 죽을 수 있고, 죽은 뒤에는 곁 사람에게 옮아가서 한 집안이 망하는 수도 있다.”
무소의 뿔인 서각(犀角)과 사향(麝香), 붉은 주사(朱沙)나 종유석(鐘乳石)을 갈아 먹는 것을 치료법으로 제시했다.

귀신 쫓는 사이비 침의

하지만 인조는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저주론에 더욱 골몰한다. 왕의 원기를 보충해 질병을 치료해야 할 내의원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술 더 뜬다. ‘세간에 사기 퇴치에 특효인 침법을 소유한 이형익이라는 자가 있으니 급료를 주고 불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인조는 “괴이하고 거짓돼 미덥지 않은 술법을 쓰는 자”라고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증상이 심해지자 결국 그를 불렀다.

지방의 떠돌이 침의였던 이형익은 스스로 “번침(燔鍼)으로 사기를 물리친다”고 공언하고 다녔으며 내의원 의관들도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번침에 대한 내용은 침구서마다 해석과 용도가 제각각인데, 침을 따뜻하게 해서 놓는 것만은 틀림없다.
‘황제내경’ 영추편에는 ‘쉬자(?刺)라는 것은 번침으로 마비증을 치료하는데 사용한다’고 돼 있으며, 당나라 왕빙은 ‘쉬자는 화침(火針)’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명대의 장개빈은 ‘번침은 침을 시술한 이후 침 위에 뜸을 떠 따뜻하게 데우는 것이고, 쉬자는 침을 불로 달궈 적색이 된 후에 시술하는 것’으로 구분했다. 같은 명대의 ‘침구대성’은 번침과 화침, 온침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번침은 체온 정도로 달군 침이고, 화침은 마유(麻油)에 적셔 불로 달군 침이며, 온침은 침과 뜸을 겸용한 것으로 시골에서 많이 사용한다’고 소개했다.

이형익과 의관들은 인조의 질환을 음적인 저주나 귀신이 일으키는 사기의 질환으로 보고 뜨겁고 붉어 양기를 가진 번침으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 이형익은 정식 의관이 아니었다. 충청도 대흥지역에서 활약한 침의인데 인조 11년 내의원의 천거로 임시 채용됐다. 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모두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흥땅에 이형익이란 자가 있는데 침법을 약간 알아 사기를 다스린다고 세상 사람을 현혹했다”고 비판했다. 이형익의 진찰능력에 쐐기를 박는 대목도 있다.
“왕세자가 앓아오던 감기가 오랫동안 낫지 않아 이형익에게 진맥을 하라고 하자 그는 ‘이 병은 사기에 의해 생긴 병이므로 침을 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가 세자에게 침을 맞으라고 하자 세자는 ‘감기인데 무슨 사질(邪疾·사기가 일으킨 질환)입니까’라며 침 맞기를 거부했다. 세자의 감기는 얼마 안가 저절로 나았다.”

홍문관에서는 나름의 검증 결과까지 열거하며 이형익의 진료를 비난했다. “오래 전부터 괴이한 방법과 신통한 비결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지만, 사대부 중에 그의 침술로 효험을 본 사람이 없고 오히려 더러 해가 따랐다.”
심지어는 침 자리조차 제대로 못 잡는 일도 있었다. 

인조 11년 10월7일 기록에는 “상(上)이 이형익에게 번침 치료를 자주 받았는데 혈 자리가 좌우에 차이가 있어 다시 확인했다”고 쓰여 있다.
이형익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1612∼1645)의 죽음과도 깊숙이 관련됐다.
 
이상곤 원장
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