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눈병·종기로 괴로워한 현종
당쟁, 强臣, 정통성 논란… 만병 불러온 ‘임금 스트레스’
완연한 봄, 전남 완도군 보길도엔 핏빛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또 졌다. 보길도는 효종이 죽은 후 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피터지게 싸운 두 인물의 악연이 얽힌 곳이다. 이른바 예송논쟁의 주역인 우암 송시열(1607 ~1689)과 고산 윤선도(1587 ~ 1671)가 그들이다.
남인의 선봉장 윤선도는 송시열이 이끌던 서인세력에게 패해 유배됐다가 보길도에서 죽었고, 그를 유배보낸 송시열은 꼭 18 년 후 자신도 보길도로 유배된다. 보길도 바위 곳곳에는 송시열의 시가 남아 있다. 떨어져 잎으로 흩어지지 않고 붉은 꽃송이째 뚝뚝 떨어지는 보길도 동백꽃의 자태는 당시 조선 민초들이 겪은 아픔을 증언하는 듯하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 사후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 즉 복상(服喪)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예법은 임금의 상에 3년 동안 상복을 입도록 했지만 장자는 3년, 차자는 1년을 입도록 했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 즉 차자이므로 1년상(기년설)을 주장한 반면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들은 기년설이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며 3년상을 주장했다.
효종의 아들 현종(1641〜1674)은 임금자리(재위기간 1659〜1674)에 오르자마자 일어난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뜻을 받아들이고 남인에게 철퇴를 내렸다. 하지만 15년 후인 1674년 자신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들을 실각시켰다(2차 예송논쟁).
서인은 인조의 장자를 소현세자로 인정한 반면, 남인은 소현세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효종이 실질적인 인조의 장자라고 봤다. 현종은 예송논쟁이 결국 자신과 아버지 효종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두고 벌어진 논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서인을 배격한 것이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현종 치세에 벌어진 남인과 서인간의 예송논쟁은 사실 민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현종 재위 15년에 걸쳐 권신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당쟁이 이어진 재위기간 내내 신경병적 증상을 보였다.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일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차라리 (내가)죽어버려 이런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한다”(재위 3년 3월23일 조회)는 극단적인 말도 했다.
이런 신경증적 태도는 건강도 악화시킨다. “직접 기도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다리의 병 때문에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형편이다”라면서 기우제를 직접 올리지 못할 만큼 아픈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재위 14년 5월1일, 가뭄이 더욱 심해지자 이번에는 지나친 자책으로 신하들을 놀라게 한다. 몸도 정치도 뜻대로 되지 않는 현종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오장이 불에 타는 듯해 차라리 죽고 싶다. 아! 무릇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해 존재하는 것인데,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나라가 무엇에 의지해 그 꼴을 유지하겠는가. 생각해보니 그 허물은 진실로 내게 있음에도 불쌍한 우리 백성이 대신 재앙을 받고 있도다.”
기근의 기록들은 딱한 수준을 넘어 비참하기까지 하다. 현종 12년 5월19일의 기록이다.
“올해 굶주리거나 병을 앓아 죽은 참상은 실로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경상도에는 굶어죽은 자가 590명이며 전라도는 2080명입니다. 시체를 땅에 묻도록 했지만 백성들이 굶어 지쳐 길에서 시체가 썩어나가고 있습니다. 흙을 덮어놓아도 소나기가 지나가면 곧 드러나니 참혹함을 이루다 아뢸 수 없습니다.”
현종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평생 동안 약을 달고 살았다. 기록상 가장 많이 처방된 탕제는 화병으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해소하는 가감양격산이다. 현종은 즉위 후 7년 동안 이 탕제를 63회나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현종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석견(1644〜1665)이 죽자(현종 7년) 이 약의 복용을 바로 중지한다. 예송논쟁과 정통성 시비가 그에게 심적으로 얼마나 큰 부담을 줬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감양격산 처방은 동의보감 ‘화(火)’편에 나오는 양격산 처방을 변형한 것으로, 양격산은 스트레스가 쌓여 심장에 열이 나고 변이 잘 나오지 않는데 쓰는 탕제다. 양격산에는 대황과 망초라는 약물이 들어있는데, 대황은 마치 장군처럼 대장을 뻥 뚫어 변비를 해소하고 관장한다고 해 장군풀로도 불린다.
가감양격산은 양격산에서 대황과 망초를 빼고 연교(連翹)를 군약(君藥)으로 배치해 마음의 열을 없앤다. 연교, 감초, 길경, 황금, 치자, 박하, 죽엽 등의 약물이 포함돼 있다. 주로 상초(심장 아래 위장 윗부분) 열을 전문으로 없애는데 쓰이는 처방이다. 동의보감은 “상초에 열이 있으면 눈에 핏발이 서며 몸이 붓고 머리와 목이 아프며, 입 안과 혀가 헌다”고 적고 있다.
동의보감의 지적처럼 현종은 눈병, 목에 멍울이 생기는 나력(일종의 한센병) 질환, 심장의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생기는 종기를 평생 동안 달고 다녔다. 눈병은 즉위년 초부터 시작돼 현종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눈에 대한 침 처방이 이어진 것은 물론, 눈을 씻어주는 세안탕과 사물용담탕, 속효산, 자신명목탕 처방이 반복됐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눈병에 좋은 광물성 약재인 공청(空靑)을 구하러 중국 서촉 지역(지금의 쓰촨성)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를 의논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