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52년 세월 동안 왕좌에 머문 영조(李衿·1694〜1776, 재위 1725〜1776). 숙종의 둘째 아들이자 경종의 이복동생이었던 그는 탕평책을 통해 조선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한 왕이자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두 얼굴’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한평생 비천한 무수리(숙빈 최씨)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산 불행한 임금이기도 했다.
비록 여든이 넘도록 장수했지만,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달고 산 ‘국민 약골’이었다. 조금만 찬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났고 소화불량에 시달렸으며 복통 때문에 소변을 보기 어려워하던 소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던 그가 83세라는 천수를 누렸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대체 그의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건강 체질을 타고난 걸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가꾸고 양육한 걸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혀가는 과정이 바로 ‘왕의 한의학’을 연재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실천으로 옮긴 건강 지혜
영조의 장수와 건강 비결을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몸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 이를 염두에 두고 과부하가 걸리진 않는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24시간 변화를 관찰하면서 신체의 약점을 알고 과부하의 경계치를 관찰하는 데는 자기 자신이 최고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영조는 평생 복통과 소화불량 등 냉기에 민감해 했다. 자신이 냉증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한평생 차가운 자리에 앉지 않고 찬 음식을 멀리하는 등 온기 보존에 신경 쓴 것은 철저한 자기 관찰의 결과다.
둘째, 자신을 냉정하게 주시하면 병이 자기 몸에서 가까이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지 방법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영조는 ‘인삼 마니아’였다. 여러 번 처방을 실험한 후 인삼을 대량으로 넣은 건공탕을 상복해 건강을 유지했다.
현대는 건강지식 홍수 시대다. 많은 사람이 신체 관리를 위한 전문지식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팔랑귀가 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심오함이다. 건강지식이 자신의 신체 상황과 맞아야 하는 데도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처럼 맹신하는 데서 문제가 불거진다.
예를 들면 우유나 인삼의 경우가 그렇다. 우유가 보급되자 과학적 분석을 통해 모유보다 더 풍부한 영양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한때 모유보다 우유를 선호했지만, 나중에 모유 성분 가운데 면역효소나 기분을 좋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유 우위설이 자취를 감췄다. 인체의 심오함을 단편적 지식의 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한 예다. 인삼도 마찬가지다. 체질에 맞지 않으면 열이 나거나 혈압을 높이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신의 체질 특성과 견줘보고 관찰해서 무엇이 몸에 맞고 맞지 않는지 진실을 확인하는게 중요하다.
셋째, 건강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모자란 듯 음식을 먹으면서 새롭지는 않으나 지혜로운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작은 노력으로 크게 건강을 얻고자 게으름을 부린다. 하지만 영조는 술을 거의 먹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밥을 제때 챙겨 먹으면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건강의 지혜를 체득했다.
대다수 왕이 선대왕을 여읜 슬픔에, 혹은 힘겨운 장례절차 와중에 건강을 잃어버린 반면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 사건 앞에서도 곡기를 끊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감선(減膳)을 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에너지 보급과 권력투쟁을 철저하게 구분짓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국가적 위기상황이나 신하들과의 갈등 때 반찬 수를 줄이거나 단식투쟁을 했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투쟁의 근본 목표에 부합한 것에만 충실했을 뿐 투쟁 그 자체에 매몰되진 않았던 영리한 왕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왕이 되기까지의 행보가 여간 험난하지 않았다. 그의 출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다.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많은 야사(野史)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면서 영조를 바라본다.
못말리는 ‘인삼 마니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영조의 체질은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83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인삼이 든 처방을 애용했다. 심지어는 말년 10년 동안 복용한 인삼이 100근이나 될 정도였다. 그의 풍성한 수염은 아버지 숙종의 풍모와 전혀 달랐고 오히려 숙빈 최씨에 가까웠다. 이것도 그가 김춘택의 아들로 의심받는 한 이유가 됐다.
성격도 아버지 숙종이나 이복형 경종, 아들 사도세자, 손자 정조와 전혀 달랐고 질병의 양상도 이들과 달랐다. 조선시대 왕들은 무장인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대개 불꽃같은 성질을 보이거나 화병을 앓았다. 심지어 화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종기를 앓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 14년 7월16일 기록엔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다”고 쓰여 있다. 극도의 화병을 호소한 대목이다.
현종도 마찬가지다. 1721년 10월 기록엔 “심화가 불어나 화열이 오르내리면서 정신이 아득하고 권태가 있어 치료하기 힘든 지경이니 조섭을 위해서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킨다”라고 적혀 있다. 경종도 즉위 후 2년에 도승지가 올린 상소를 읽다 화열이 오르고 심기가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성계와 아버지 숙종의 체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 하다.
하지만 영조는 달랐다. 일생동안 화열을 돋우는 인삼을 달고 살았다. 그가 가장 많이 복용한 것도 한의학 처방 중 인삼이 가장 많이 포함된 건공탕이었다. 영조 41년의 처방 기록에 의하면 매일 8.8돈(30g)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인삼을 복용했다. 영조 스스로도 “제조에게 인삼의 정기를 얻어 건강하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인삼 애호가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는 숙종과 경종 등 전대 왕들처럼 화열이 많은, 따라서 인삼이 맞지 않는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도세자의 경우를 보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왜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물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마음에 화증이 나면 견디지 못해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풀어지기에 그랬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이 병이 커져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데는 역사적으로 이의가 없다.
정조는 더욱 치열하게 내면의 화병과 싸웠다. 화를 내리는 가미소요산과 우황, 금은화를 밥 먹듯 먹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고 소량의 인삼도 극도로 경계해 복용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인삼을 기피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체질을 이어받아 소음인에 가까운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일생 동안 보인 정치적 행태는 매우 자학적이었다. 대신들과 문제가 생기면 이를 쟁점으로 탕약 복용을 거부해 약자로서 탄압받는 임금의 모습을 부각했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능동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소음인의 특징을 보인 것이다. 영조 50년엔 유생과 백성들을 모아놓고 현상금을 내걸어 탕제 정지 여부를 묻는 행사도 벌였다. 또한 소식(小食)을 즐기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는 등 절제된 식생활을 이어나갔다. 소화 기능이 약한 소음인 체질이 아니고선 실천하기 힘든 식습관이다.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