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연제법을 건강 회복하는 보편적 치료법의 하나로 선택해
수동적 소음인 특징 뚜렷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그는 이복형 경종 밑에서 왕세제로 있으면서 조금만 한눈팔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녀들의 여종인 무수리였다. 왕의 어머니라곤 상상하기 힘든 천한 신분을 딛고 영조는 출발점에 섰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상대로 저주의 굿판을 벌인 후 죽임을 당한 것은 숙빈 최씨가 진실을 알린 덕분이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고 난 후 경종과 영조는 갈등관계에 돌입한다.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자식인데 예뻐 보일 리가 만무할 터.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고리 권력’인 실세 환관 박상검과 영조간에 불거진 갈등은 1인자와 2인자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불안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뒤이은 목호룡의 고변은 왕과 왕세제간 일촉즉발의 순간순간으로 이어졌다.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 의혹은 남인과 소론 강경파에 의해 더욱 증폭됐다. 경종은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단감을 먹고 죽었는데, 영조 31년 5월20일 소론의 선두주자로 반란을 꾀했던 신치운은 스스로 “신은 영조 즉위년인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경종 독살설의 의혹이 영조 재위 31년까지 뻗친 것이다. 게다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죄책감은 결코 다른 왕들보다 작은 스트레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영조가 앓은 질병은 대부분 소화력 부진이나 복통 등 한랭성 질환이었다. ‘골골백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체질이었다. 다만 궁궐 밖에서 생활하던 18세에 두창을 크게 앓은 것을 제외하면 본인의 판단과 선제적 대처로 질병을 예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를 괴롭힌 질환은 산증(疝症)이었다. 경종 재위 시절 왕세제였던 그는 산증으로 경연(經筵)을 자주 쉬어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산증은 한의학적 병명으로, 현대의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복냉통증후군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소화불량과 전립선질환이 복합된 것이며, 여성으로 말하면 생리통과 냉대하로 인한 자궁 하복통 질환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은 ‘산증은 부위별 분류에 따라 전음(前陰)에 배속하였다. 전음은 종근이 모이는 곳이며 종근이란 음부의 털이 나는 곳에 가로놓인 뼈의 위아래에 있는 힘줄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산증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 기운으로 인해 생긴다. 송나라 양사영의 ‘직지방(直指方)’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산증이란 음낭과 아랫배가 아픈 것이다.…오한과 발열이 생기다가 대소변을 보지 못하거나 설사가 나기도 하는데 적취(積聚·몸 안에 쌓인 기로 인해 덩어리가 생겨 아픈 병)가 생겨 술잔 같거나 팔뚝 같거나 쟁반 같기도 하다.’
“만 가지 보약이 헛것”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10월12일 기록에선 영조 스스로 산증이 생긴 원인을 자세히 설명한다. 요지는 이러하다.
‘홍진(홍역) 이후에 처음에는 산기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체기가 있어서 청열소도지제를 다복하여 하부가 궐랭하고 해역이 병발해 독음에 뜸을 뜨고 방풍산을 써서 효과를 보았으나 그 찬 약이 문제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8일 기록에서 영조는 “홍진 때 쓴 우황과 찬 약이 산증을 유발했다”고 회고한다. 영조는 생활습관 문제도 고백한다.
‘예전 같으면 여름에는 생냉물을 먹지 않았으나 요즘은 과인이 스스로 과식한 측면이 있고, 겨울이 되어서도 오히려 수족을 차게 하는 등 온몸을 두루 차갑게 했다. 평상시 과인의 처신이 몸을 차갑게 한 것이다.’
산증의 형태에 대해서도 ‘지금 복부는 손으로 만져보면 옆으로 횡단지기가 있는데, 의복이 단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여름에 덥다고 생랭(生冷)한 것을 과식한 소치’라고 밝혔다.
산증은 소변을 보기 어렵거나 참기 힘들게 해 영조를 계속 곤란케 했다. 영조 2년 10월14일 승정원일기엔 ‘어릴 때부터 소변을 자주 보았는데 최근에는 더욱 심해져 하룻밤에 수차에 걸쳐 들락날락했다. 특히 요번 제사 때 초헌을 보는데 소변이 심히 마려워 실례를 할 뻔했다’라고 곤혹스러운 경험을 밝혔다. 심지어 ‘소변이 방울방울 떨어져 고통스럽다’라고 고민을 털어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소변에 관한 한 아버지 숙종은 아들 영조와 꼭 닮았다. 숙종 10년엔 사심도적산과 삼호작약탕 등에 대한 처방을 주문했는데 이들 처방은 모두 소변을 순조롭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찬 약물이나 생활습관에서 산증의 원인을 찾지만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화병으로 설명한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숙종의 경우 변덕스럽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고려하면 무장의 후예다운 질병이었다. 사실 영조도 자가진단과 달리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에 시달렸다. 앞에서 본대로 즉위할 때까지의 스트레스와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신하들 사이에 끼여 자학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7년의 기록엔 ‘만 가지 보약이 헛것이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하거나 영조 9년엔 ‘온갖 보약이 다 헛것이고 마음을 맑게하는 것이 요방이다’라며 괴로운 심경을 표현했다. 영조 44년의 기록에도 ‘아, 나의 병은 첫째도 심기이고 둘째도 심기에서 비롯된다’라고 토로했다. 영조 13년엔 현기증을 호소하면서 고암심신환이라는 처방을 내리는데 그때 현기증의 원인을 화라고 규정한다.
화가 원인이 된 산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른 원인으로 발생한 것과 차이가 있다. 숙종과 영조의 소변에 관한 처방은 비교의 기본점이 된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치료 원칙은 허와 실을 가리는 데 있다. 두 임금의 질병 양상은 허와 실 사이에서 차이가 크다. 숙종은 소변이 붉고 갈증을 자주 호소했는데 도적산 계열의 찬 약물을 위주로 공격적인 처방을 한 반면, 소변을 보기 힘들거나 참기 힘들어 하며 설사가 잦은 허증 증상을 보인 영조의 경우는 내부를 따뜻하게 데우는 반총산을 위주로 처방했다. 영조는 ‘반총산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다’고 할 정도로 애용했다.
소화기 냉증 치료하려 배꼽 뜸질
회충에 의한 상충(上衝·위로 치밀어 오름)감과 구역감을 회기라고 하는데 이 증상은 영조 20년에서 41년까지 이어진다. 회충을 치료하는 약물은 모두 매운 약이다. 위장의 온기를 올려 회충이 살 조건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처방이었다. 어의들은 위장의 온기를 보태기 위해 한편으로는 뜸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영조도 자신의 건강상 약점이 소화기 냉증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연제법(煉臍法)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연제법은 배꼽을 뜸질하는 것인데, 방식은 직접구가 아닌 간접구에 가깝다. 쑥뜸과 피부 표면 사이에 소금이나 약재를 넣어 열기가 피부에 직접 닿아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인체를 보는 지혜가 동서양에서 일치하는 것은 배꼽이다. 왜 배꼽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는 의학과 예술의 융합점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인체도는 다빈치의 역작이지만, 그 속에 있는 사각형과 원을 통한 비례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것이다.
‘배꼽이 인체의 중심’ 동서양 일치돼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다리를 뻗은 다음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발의 발가락 끝이 몸에 닿는다.”
손발을 뻗은 인체의 중심이 배꼽이라는 생각은 동의보감에도 유사하게 기록돼 있다. 동의보감 배꼽편은 “팔을 위로 올리고 땅을 디디고 서서 줄로 재보면 중심이 바로 배꼽에 해당된다”라고 했다. 손을 들어 올린 모습에서 배꼽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데는 동서양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배꼽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월인석보’에선 배꼽을 ‘빗복’으로 적고 있는데 배의 한복판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성서 욥기 40장 16절은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꼽에 있느니라”고했다. 동의보감은 더욱 구체적으로 배꼽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치료 효능까지 덤으로 적었다.
‘배꼽 줄은 마치 과일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을 때 양분이 과실꼭지를 통하는 것과 같다. 배꼽에 더운 김을 쏘여주어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에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주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뜸을 뜨고 더운 김을 쏘이는 것은 배꼽이 차갑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엔 한의학 고유의 음양론이 뿌리내리고 있다. 배꼽은 자궁 속 태아 상태에서 영양분을 받는 유일한 통로다. 어머니는 배꼽을 통해 태아의 음형을 기르는 물질적 기초를 공급한다. 출생 후 닫혀 있어도 배꼽은 인체의 정혈이라는 음기가 모이는 축이다.
영조는 배꼽 뜸질을 건강을 회복하는 보편적 치료법의 하나로 선택했다. 동의보감은 배꼽을 데우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시했다. 소금이나 회화나무 껍질로 배꼽을 덮고 난 뒤 배꼽에 쑥뜸을 뜨는 방법, 부자를 비롯한 따뜻한 약으로 고약을 만들어 붙이는 방법, 배꼽을 약쑥으로 덮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배꼽을 데우면 ‘냉대하와 월경이 고르지 못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라고 적기도 했다.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