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종기치료를 위해 열을 내리는 청열약과 온보를 위해 인삼을 넣은 경옥고와 팔물탕 등 두가지 흐름으로 접근해
깍두기가 담배 독 제거?
정조는 깍두기와 담배 애호가였다. 홍선표는 저서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서 “200년 전 정조의 사위인 영명위(永明慰)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숙선공주)이 임금에게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렀으며, 그 후 여염집에도 퍼졌다. 고춧가루 대신 붉은 날고추를 갈아서 쓰면 빛깔이 곱고 맛도 더욱 좋다.”
무가 독을 없앤다는 각독기설은 ‘본초강목’에도 언급돼 있다. 두부를 즐겨 먹어 중독에 이른 한 두부 상인이 무즙을 먹고 두부 독을 없앴다는 얘기다. 아내가 두부 만드는 냄비에 실수로 무를 넣었는데 끝내 두부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곤 실제로 무를 먹었더니 두부 독이 사라졌다는 것. 난을 피해 석굴에 들어간 사람이 적이 피워 넣은 연기에 질식해서 죽게 됐는데 무를 먹어 입안에서 즙으로 만들어 삼키자 소생했다는 얘기도 덤으로 들어 있다.
정조가 지독한 골초였음을 감안하면 숙선공주가 담배 독을 제거하려고 깍두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조의 문집 ‘홍제전서(弘齋全書)’엔 담배의 별칭 ‘남령초’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퇴고할 때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격무 속에서도 담배 한 대를 물고서 느긋하게 휴식하는 왕이었지만, 담배의 화기가 결국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하다.
정조에게 종기가 발생한 시점부터 사망 시점까지는 1800년 6월14일부터 14일간에 불과했다. 종기 치료를 위해 많은 처방과 고약이 투여됐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두 가지였다. 열을 내리는 청열약과 온보를 위해 인삼을 넣은 경옥고와 팔물탕이다. 청열약으로는 가미소요산과 백호탕이 대부분 처방됐고, 온보약으로는 경옥고와 팔물탕이 주로 처방됐다. 가미소요산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을 내리는 서늘한 약재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을 겸해 정조가 애용했다. 최후의 14일 동안에도 가장 주도적인 처방으로 기록돼 있다.
백호탕은 석고를 주재료로 만든 처방이다. 석고가 흰색이어서 호랑이처럼 내부의 열을 물어뜯어 없앤다고 처방된 청열약이다. 종기의 열을 내리려고 유분 탁리산을 처방하는데, 이는 피부의 열을 내리는 녹두가 대부분인 처방이다. 메밀밥을 개어 종기에 붙이는데, 메밀 또한 찬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6월23일부터 증상이 개선되자 강명길이 경옥고를 복용할 것을 은근히 권유한다. 이런 권유엔 종기가 생긴 이후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배경이 있다. 소의 양이라 불리는 위즙이나 녹두죽 등을 권유했지만 정조는 쌀미음을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조선 후기 의학의 흐름도 한몫했다는 추측이 많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장수를 누린 것은 꾸준한 건공탕 복용 덕이 컸는데, 이 처방엔 엄청난 양의 인삼이 들어가 원기 보강이 큰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종기 치료엔 소(消)법과 탁(托)법이 있다. 열을 소멸시키는 법과 밀어내는 법이다. 청열약이 소멸시키는 방법을 주도한다면 밀어내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하므로 황기라든지 인삼을 사용하는 게 필수다.
그러나 인삼에 관한한 정조는 ‘결사반대’였다. 6월23일 정조는 처음 열 증세가 일어난 것이 더위를 없애는 육화탕 탓이라 여기고 경옥고 처방을 단호히 거부한다. 6월24일엔 갈증을 없애고 맥을 살리는 생맥산이란 처방을 권해도 먹지 않았다. 6월25일 번열증이 있는데 온보하는 약을 먹을 수 없다며 다시 거부한다. 그러다 생맥산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했으나 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경옥고를 귤강차에 타서 복용한다. 이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정조 24년 6월23일 정조 독살설의 뿌리가 된, 수은이 함유된 연훈(煙燻)방이 처음 등장한다. 6월14일 제조(提調) 서용보에게 종기의 고통을 호소한 이래 병의 진척이 없자 최후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전에도 종기를 앓았던 정조는 저잣거리의 천민 의사 피재길의 도움으로 병을 고친 적이 있었기에 새로운 도움을 받고자 변씨 의원과 장영장관(將營將官) 심인(沈鏔)을 부른다. 심인은 독살설의 장본인이자 정조어찰의 상대방인 심환지(沈煥之·1730~1802)의 친척뻘이다. 심인이 정식 내의원이 아닌 장영장관인 것은 궁궐에 들어오기 위해 임시 직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연훈방과 팔물탕
왕에게 약을 사용하려면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임상실험 결과 변씨 의원의 토끼 가죽은 신봉조가 효과를 보았고 연훈방은 서정수가 효험을 보아 안전성과 효능을 담보했다. 6월26일 연훈방을 사용한 뒤 진료의 전 과정을 관장하는 도제조 이시수가 말했다. “조금 전 연훈방을 사용한 뒤 심인과 여러 의관이 하는 말은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의관뿐만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이때 종기에 고여 있던 피고름이 한 바가지 빠져 나와 이불과 옷을 모두 적셨다. 이 점이 호전이냐 악화냐 하는 점은 다른 경우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정조 24년 혜경궁 홍씨가 종기로 고생했다. 며칠을 끌다 피고름이 많이 나와 종기가 나았다는 기록을 보면 분명한 호전 증상이다. 연훈방은 수은을 태운 유해한 약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태우고 흡입했을까.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경면주사(유화수은의 일종)를 잘게 부수고 옛 한지에 말아 모래 위에 꽂아서 태운다. 그런 뒤 연기를 모으기 위해 고깔을 써서 코로 흡입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기록에서 3번 사용했다고 전하지만 기록을 자세히 보면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임금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약물이 논의된다. 정조는 “이제는 열을 다스리는 약을 크게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가미소요산에 사물탕을 합방해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왕과 신하의 나라인 조선에서 왕의 뜻만 관철될 수는 없다. 도제조 이시수는 경옥고를 비롯한 육군자탕, 생맥산, 팔물탕 등을 추천했다. 경옥고는 특히 어의 강명길의 추천이 곁들여졌다.
그런데 이시수가 보기에도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됐다. “어제 저녁에도 주무시는 듯 몽롱해 보이셨는데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 정조는 “어젯밤의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라며 고통을 호소한다. 이후 증세는 급격히 악화되고 정조는 숨을 거뒀다.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환은 종기가 분명하다. 그러나 진료 기록을 보면 더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인삼 아니었을까. 이건 필자의 억측일까.
미완의 개혁가였던 정조는 그의 정치 행로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규장각, 장용영, 화성행궁을 설치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려 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됐다. 강명길과 이시수 등의 건의를 묵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인삼을 끝까지 복용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혼수상태에서 인삼이 듬뿍 든 팔물탕을 받아 마시는 기분은 어땠을까. 자신의 길과 보편적 지식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정조의 고뇌는 건강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답하게 해준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을 낳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