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병치레…‘국민 약골’ 순조
心膽虛怯 ‘내향성 스타일’…약물 처방만 100여 종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1790〜1834, 재위 1800〜1834)는 왕비들의 권력으로 인해 부침이 잦았던 나약한 군주다. 정조의 둘째 아들로 수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겨우 11세 때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벽파(僻派)의 영수(領袖) 김귀주의 누이동생이다. 정조가 처단한 김귀주 대신 그가 육촌인 김관주를 이조(吏曹)에 앉혀 벽파를 등용한 건 당연지사다.
앞날을 가늠한 당대의 천재 정조는 자기가 죽기 전 당쟁으로 권력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 것을 걱정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간택해뒀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권력이 바로 김조순에게 쏠리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됐고 인사권과 과거제도,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이어진다.
수두, 홍역, 마마…
조선의 최고 과제는 왕권 강화였다.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태종조차 처가의 발호를 경계해 왕비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처남인 민씨 형제를 모두 제거했다. 뒤에 발호할지도 모를 세종의 장인마저 죽여버릴 정도로 외척과 처가의 권력화를 경계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그만큼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중종반정 이후 단경왕후와 강제로 갈라서게 한 뒤 생긴 치마바위 전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왕비 권력의 생리를 반영했다면, 인조반정 성공 이후 노론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전략이 ‘국혼을 놓치지 말자’였다는 이야기는 왕비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현실적으로 평가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순조는 재위 19년 자신의 원자가 10세가 되자 다시 한 번 권력의 축을 옮기기 위해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던 효명세자가 22세 나이로 요절하면서 왕권은 약해지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전성기를 맞는다.
순조는 ‘국민 약골’이었다. 어릴 때부터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두 앓았다. 12세 때인 즉위 1년 11월19일엔 수두를 앓았다. 의관들은 홍역과 같으나 홍역은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언제부터 발진했는지 묻는다. 순조는 “발과 다리 부분에서 발진했는데, 몸에도 많이 나 있다”고 말한다. 의관들은 해기음과 승마갈근탕을 처방했는데, 열흘 뒤인 11월29일 수두로 진단하면서 완치됐음을 선언한다.
수두를 앓은 지 1년 후 순조는 홍역을 앓는다. 임금의 회복을 축하하는 교문(敎文)에서 “오랫동안 설치던 홍역이 갑자기 궁중에까지 침범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홍역이 궁궐 내로 퍼진 것을 알 수 있다. 순조는 당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왕비 책봉 15일 후 부부가 함께 홍역을 앓은 셈이다. 순조에겐 가미승갈탕, 왕비에겐 가미강활산이 처방돼 17일만에 완쾌해 고유제를 지냈다.
순조는 재위 5년에 다시 두진(痘疹·천연두의 증상으로, 춥고 열이 나며 얼굴부터 전신에 붉은 점이 생김) 마마의 증세를 앓는다. 2월18일 시작된 마마 증세는 27일 완치된다. 예조에선 “왕의 두창 증후가 빨리 회복됐으며…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여 진하(進賀)의 의절을 거행하소서”라고 건의하면서 의관들과 도제조들에게 포상한다.
두창은 전염병이지만, 당시 처방에 사용했던 약물의 구성을 보면 순조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다. 질병이 시작된 초기엔 가미활혈음이라는 마마 치료약을 처방했지만 나중엔 가미귀룡탕이란 처방이 잇따른다. 귀룡탕은 허약한 소아가 복용하는 대표적인 처방으로 당귀와 녹용을 같은 양으로 하여 술에 달여 먹게 하는 것이다.
마마에 보약을 처방했다는 건 순조가 어릴 때부터 허약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귀룡탕의 또 다른 적응증은 스태미너 부족을 보충하는 것이다. 양기가 허약해 후사를 잇고 싶을 때 복용하는 처방이다. 그래선지 순조의 여인은 정비 순원왕후 김씨와 숙의 박씨 둘이 전부다. 계비는 없었으며 두 명의 부인에게서 1남 5녀의 자식을 얻었다.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