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질병 없던 고종 낮밤 뒤바뀐 생활로 뇌일혈
당뇨·심장 질환 등을 통칭하던 성인병(成人病)이란 명칭이 생활습관병으로 바뀌었다. 대한내과학회는 2003년 “이른바 성인병은 대부분 흡연, 과식, 과음, 운동 부족 등 잘못된 생활습관의 반복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올바른 생활습관을 지녀야 한다는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성인병’이란 명칭을 ‘생활습관병’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실 질병은 대부분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1852~1919, 재위 1863~1907)은 나름대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조선 말기 대다수 왕이 병과 싸우면서 많은 처방 및 치료 기록을 남겼지만, 고종은 ‘조선왕조실록’과 ‘태의원일기’ 모두 소화불량이나 가벼운 피부염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하지만 생활습관에선 유별나게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오래하면서 야식을 먹었다.
명성황후의 영향력
‘경성일보’ 1919년 1월24일자엔 덕수궁 촉탁의인 가미오카의 구술담이 실렸다. 고종의 평상시 생활습관에 대한 것이다.
고종은 평소 새벽 3시에 침소에 들었고 오전 11시경 기상해 오후 3시경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은 과자나 죽을 먹었으며, 저녁식사는 밤 11시에서 12시경에 했다고 했다.
키는 153cm, 몸무게는 70kg 정도였으며 시력은 좋아서 노안이나 근시의 징후 없이 건강했다고 했다.
고종은 늦게 자고 야식을 반복해 소화력이 떨어지면서 소화제를 복용하고 수면제 격인 온담탕을 복용했다.
하지만 건강은 약이 아니라 생활습관에서 만들어진다. 늦게 자고 야식을 먹는 습관은 결국 중풍을 유발했고, 이는 3·1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한 사람의 생활습관이 세상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올빼미 생활을 하는 데는 명성황후의 영향이 컸다. 비록 양자로 들어왔지만 자신의 오빠였던 민승호가 폭탄테러로 사망한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공포와 원망,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했다.
폭탄테러의 진상은 이렇다. 민승호의 생모가 죽고 난 후 상중에 함 하나가 배달됐다. 밀실에서 자물쇠를 열어 함을 확인하려는 순간 폭탄이 터져 민승호와 그의 아들, 할머니가 온몸이 숯처럼 타서 죽었다. 이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895년 8월6일 이노우에 가오루가 일본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엔 그가 고종과 명성황후를 접견했을 땐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이 민승호를 죽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왕실의 관행으로 본다면 왕비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는다는 건 고종의 동의 내지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 술 더 떠 같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는 건 명성황후가 고종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방증이다.
고종의 생활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명성황후의 간택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명성황후 민씨가 고아였다고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매천야록’에 소개된 글 중 고녀(孤女)라는 표현탓에 잘못 알려진 것이다.
매천야록은 “김병학은 흥선대원군과 밀약하여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하였다. 외척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는데 곧바로 김병학을 배신하고 민치록의 고녀에게 국혼을 정하였다”고 기록했다.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