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던 고종황제, 식혜를 마신 후 심한 경련-윤치영 일기에 기록돼 있어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 3·1운동으로 이어져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3·1운동으로 이어지게 한 중요한 사건이다. 1919년 1월21일 새벽 1시15분경부터 증상이 시작돼 새벽 6시30분 중태에 빠지는 과정에서 당시 고종을 가장 먼저 진찰하고 임종을 지킨 의사는 일본인 여의 도가와 기누코다. 당시 주치의였던 가미오카의 몸이 불편해지면서 대신 고종을 진찰한 여의다. 1월23일자 경성일보는 도가와를 인터뷰하고 그의 술회를 게재했다.
고종은 발병하기 4, 5일 전부터 “다소 식욕이 없고 잠이 잘 오지 않네”하고 몸 상태를 설명했는데, 발병 전 의자에 앉아 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도가와는 발병 연락을 받은 후 허둥지둥 전의와 참궁을 했는데, 2회부터 7회까지 고종의 경련이 계속됐다. 맥박이 2, 3회에는 110회, 4회부터는 130에서 140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체온도 37도7부로 올라갔다. 8회째부터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졌다. 경련은 12회까지 계속 됐고, 고종은 오전 6시경 훙거(薨去)했다.
고종의 발병에서 임종까지의 시간별 경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1월20일 오전 11시 고종은 촉탁의 안상호가 배진한 뒤 아침 식사를 했다. 오후 3시에 가미온담탕을 복용하고 가미오카와 도가와의 진찰을 받았다. 오후 9시엔 소화제로 가미양위탕을 복용했다. 밤 10시엔 저녁 식사를 했고, 전의 김형배와 촉탁의 안상호의 진찰을 받았으며 12시와 1월21일 새벽 1시 사이에 자다 발병했다. 전의 김형배가 청심환을 처방하고 도가와가 참궁해 진찰했으며 새벽 2시30분에 안상호가, 4시53분엔 가미오카가, 5시30분엔 모리야스 하가가 배진했다.
독살과 관련한 구체적 기록은 윤치영의 일기다. 기록은 고종의 시신을 목격한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함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듣고 적은 것이다. 1920년 10월13일자 기록은 독살 혐의를 몇 가지로 분류했다.
①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 후 죽었다. ②고종황제의 팔다리가 1~2일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③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 안을 닦아내다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가 닳아 없어졌음을 발견했다. ④30cm나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있었다.
일본, 독살설 경성일보에 해명하기도
일본은 독살설을 해명하려고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장문의 해명 기사를 올렸다. 밤 11시경 나인 신응선이 고종에게 은기에 담은 식혜를 바쳤는데 그 중 10분의 2를 고종이 마시고 나머지는 나인 양춘기, 이완응, 최헌식, 김옥기, 김정완 등이 나눠 마셨다고 구체적으로 식혜 독살설을 부인했다.
식혜에 독을 탄 궁녀 2명이 함구를 위해 독살됐다는 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박완기라는 나인은 내전 청소와 아궁이 잡역에 종사하다 폐결핵을 앓아 죽었는데 고종의 음식에 다가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며, 또 한명의 나인은 창덕궁 침방에 근무하는 자로서 덕수궁에 출입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①과 ②의 현상은 시신 팽창 때문에 통상 하루 안에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자연조건 하에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은 왕세자가 도착한 4일 후에 염을 하면서 부패가 진행돼 나타난 현상으로 반박했다.
고종은 서양문물에 대해선 열린 자세를 견지했다. 동시대 최고 실권자였던 서태후가 서양의학과 약품을 철저히 배제한 반면, 고종은 일찍부터 선교사 앨런을 통해 광혜원을 세울 수 있었고 서양인 의사들로부터 건강 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1893년 궁녀를 마지막으로 뽑았는데, 일제에 의해 이태왕이란 이름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론 1890년대 200명에 달한 궁녀가 20여명으로 줄었다. 궁중 법도는 허물어지고, 궁중 음식에 만족하지 못해 요릿집에 주문해 음식을 시켜 먹기도 했다. 1903년엔 쌀에서 돌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해 밥을 먹다 이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숙수 김원근이 유배를 당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상곤 원장·갑산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