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 계곡의 깨진 돌 틈에서 자라는 석창포는 기억력 증진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왕실의 왕권 강화에 가장 큰 장애물은 외척이나 처가 집안의 권력화였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노론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정략은 ‘국혼(國婚)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것. 왕비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1세에 왕위에 오른 순조는 자라며 심각한 신경증에 시달렸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이어 장인 김조순 등 처가 세력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기 때문. “정신이 혼미해 앞뒤의 일을 잊어버리는 때가 잦다”는 승정원일기(순조 11년)의 기록은 그의 신경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순조는 지속적인 건망증과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한의학에서는 가위눌림을 귀염(鬼(염,엽))이라 한다. 이름처럼 귀신이 압박한다고 본 것. 동의보감은 이 증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잠들었을 때는 혼백이 밖으로 나가는데 그 틈을 타서 귀사가 침입하여 정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어의들은 순조의 불안함과 가위눌림의 현실적 원인을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혈기(血氣) 부족에서 찾고 그 치료를 위해 ‘웅주산’과 ‘인삼석창포차’를 처방했다. 웅주산은 가위눌림을 치료하는 대표적 처방으로, 우황, 웅황, 주사 등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재로 구성됐다. 이 중 주사는 수은을 함유한 광물성 약재로 당시에도 부작용이 심해 처방을 꺼렸는데 이런 처방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순조의 병세가 심했다는 방증이다.
인삼석창포차는 순조의 기억력 감퇴를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약재다. 이 처방의 핵심 약재는 인삼이 아니라 석창포다. 동의보감이 기억력 증진에 좋다고 밝힌 ‘총명탕’, ‘공자대성침중방’, ‘주자독서환’ 등의 처방에 모두 이 석창포가 들어가 있다. 동의보감은 ‘총명탕’의 효능에 대해 “잘 잊는 증상을 치료하는데 오랫동안 먹으면 하루 1000마디 말을 기억한다”고 썼다. 공자대성침중방과 주자독서환은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성리학 조종인 주자를 약 이름에 붙인 것을 보면 그 효능을 짐작할 수 있다.
석창포는 단오절에 머리 감는 데 썼던 창포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창포는 연못가 습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식물인 반면, 석창포는 산간 계곡의 깨진 돌 틈에서 조금씩 자라는 귀한 약재였다. 한방에선 석창포의 사철 푸르고 매운 기운이 양기(陽氣)를 강화해 치매, 건망증을 개선하고 기억력을 증진시킨다고 본다. 태양이 사물을 환하게 비추듯, 석창포는 양기를 북돋워 희미해진 정신을 밝힌다는 것. 석창포가 총명탕의 주재료가 된 이유다.
석창포는 난치질환으로 알려진 난청과 귀울림(이명)의 치료에도 쓰이는데 이 질환들을 주로 다루는 필자에겐 이처럼 고마운 약재도 없다. 사실 총명탕의 ‘총(聰)’자는 ‘총명하다’는 뜻 외에 ‘귀가 밝다’는 뜻으로도 널리 쓰인다. 글자에도 귀 이(耳)자가 들어 있다. ‘잘 들어 기억하는 능력’이 있어야 총명해지고, ‘총명하려면 청력도 좋아야 한다’는 얘기로도 해석된다. 실제 난청이 심하면 건망증과 치매가 빨리 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귀한 석창포를 어렵사리 구해 임금님께 바쳤다. 실록은 “임금(인조)의 약재로 쓸 석창포를 전남 장성현에서 구했다”고 적고 있다. 비록 과장된 측면이 많지만 옛 약물서가 전하는 석창포의 치유력은 대단하다. 당나라 시대 명의 손사막의 저서 ‘천금요방’이 전하는 석창포의 약효는 이렇다.
“석창포와 원지를 곱게 가루 내 매번 1돈씩 미음이나 술에 타 하루 세 번 먹으면 귀와 눈이 밝아짐은 물론, 밖에서 안을 보고 1000리 밖의 일도 볼 수 있다. 잊어버리는 증상을 치료하며 지혜를 길러준다.”
인삼은 일찍 캐면 약효가 거칠어 소화기에 작용하지만 오래되면 약효가 정밀해져 정신을 강화하고 지혜를 북돋운다. 석창포차에 더해 먹으면 기억력 증진에 더욱 좋다.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