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한치형을 접견하며 “이곳에는 소찬(素饌)이 맛이 좋기 때문에 즐겨 들지만, 그곳은 맛이 좋은 소찬이 없던가?”라며 조선의 채소와 나물의 맛에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내비친다.
봄나물은 특히 춘곤증을 이기는 식보의 핵심이다. 새싹들이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것은 봄이 가진 생명력, 즉 힘 때문이다. 새싹의 생명력, 자신보다 수백 배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지상으로 솟아나는 힘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힘을 함유한 것이 봄나물의 효능이다.
미나리는 봄의 상징과도 같은 나물이다. 한의학에서는 푸른색과 긴 줄기를 간의 상징으로 추론하며 간 기능에 크게 도움이 되는 나물로 꼽는다. 술로 인해 간이 부담을 느껴 생기는 갈증과 열독을 없애주는 것은 물론 황달의 치료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동의보감은 서술하였다. 기를 생기게 하고 정신을 맑힌다는 것은 덤이다.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이 되었을 때 “장다리는 한철이고 미나리는 사철일세”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인현왕후의 고달픈 처지를 응원하는 한국적 정서의 산물이다. 미나리가 세 가지 덕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첫째는 집 앞 하수 같은 더러운 물에서도 물을 정화하고 악취를 승화하여 자신의 푸르름과 향기를 만들어가는 힘, 둘째는 음지에서 악조건을 견디면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는 강인한 인내력, 셋째는 가뭄에도 시들지 않고 신선한 푸르름을 유지하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선비들의 교육장인 성균관을 근궁(芹宮·미나리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봄의 튀어 오르는 양기를 함유한 또 다른 채소는 부추다. 부추는 양기(陽氣)를 일으킨다 해서 ‘기양초(起陽草)’로도 불린다. 부추가 양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재배해 보면 알 수 있다. 부추는 튀어 오르고 팽창하는 힘이 있어 깊게 심지 않으면 농사를 망친다.
조선 왕의 밥상은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것처럼 맛있는 요리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의 인격을 완성하여 밖으로 왕 노릇을 잘하라는 수행의 한 방법이다. 왕이 먹는 12첩 반상도 12개월을 상징하며 우주의 시간을 자신의 밥상에 채우면서 평정한 자연의 마음을 체현하겠다는 상징이다. 자연의 내재된 법칙인 음양오행을 따라 식사를 함으로써 고요하고 욕망이 진정된 도덕심을 얻겠다는 의미다. 양적인 미나리나 부추를 먹으면 반대로 음적인 나물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음기의 상징인 고사리는 다 자라도 햇볕 아래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 효능도 음기와 관계가 깊다. 해가 뜨는 것이 양이면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것은 음이다. 음기는 불면증에 좋다. 영조 9년 8월, 밥맛이 없고 불면증으로 새벽에 깨어 있는 왕을 위해 좌의정 서명균은 고사리를 권한다. 동의보감은 더 구체적으로 고사리가 음기가 강해서 양기를 줄인다고 표현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