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9-07-02 14:27
제 목
[이상곤의 실록한의학]〈76〉영조의 더위나기 비법 보리밥
작성자
코끼리
910
조회수


‘맥(麥)’이라는 한자는 ‘보리’를 뜻한다. 단, 맥 자가 붙는다고 모두 보리는 아니다. 대맥은 보리, 소맥은 밀, 목맥은 메밀을 뜻한다. 보리 베기는 필자가 해 본 농사일 중 가장 힘들었다. 보리까락의 따가움에 땡볕은 그 고통을 배가시켰다. 까락을 털어내기 위해 뛰어든 연못에서는 물뱀이 따라왔다. 농사일에 대한 로망은 그때 모두 사라졌다. 
 
흔히 보리밥은 영조의 장수 비결 중 하나로 꼽힌다. 왕이 보리밥을 먹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실록 기록상으로는 영조가 거의 유일하다. 특히 여름철에 먹은 기록이 집중돼 있다. 보리는 음(陰)의 성질을 가진 곡식이다. 서늘하고 찰지다. 한의학에서 양(陽)은 팽창하고 외부를 향하는 성질을 지니고, 음은 수축하고 내부를 향하며 응축하는 성질을 지닌다. 응축한 것을 풀려면 몇 번이고 열을 가해야 한다. 보리밥을 할 때 두 번 찌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먼저 한 번 쪄서 대나무 소쿠리에 올려놨다가 밥을 지어야 제맛을 즐길 수 있다. 날씨가 더워지면 인체의 내부도 달아오른다. 식욕이 떨어지는 것은 위장에 열이 오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찬 성질을 가진 보리밥은 달아오른 몸을 서늘하게 식혀 입맛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영조는 입맛이 무척 까다로웠다. 과일은 냉기 때문에 싫어했고 젓갈도 짠맛 때문에 먹지 않았다. 미숫가루도 가루음식이라 싫어했고 생선은 비린내 때문에 손대지 않았다. 민어나 조기류를 권했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여름이 되면 대여섯 숟가락을 뜨고는 더 이상 밥을 먹지 못했다. 유일하게 먹은 것이라고는 보리밥을 물에 말아 먹는 ‘수요맥수라(水요麥水刺)’였다. 여름날 밥맛이 떨어진 영조가 먹었던 보리밥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사이자 건강식이었다. 영조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원해서 소식을 한 게 아니라 입맛이 없어 식사량을 줄인 것”이었다. 영조는 재위 10년 5월 4일 실록에서 “다른 사람은 세 끼를 먹고도 속이 허하고 배고프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밥맛이 없어서 더 먹고 싶지가 않다”며 탄식한다.

‘본초강목’에는 보리에 대해 ‘음의 성질로 열을 없애고 기를 도우며 소갈(消渴)을 없앤다’고 썼다. 소갈은 당뇨와 유사하다. 한의학은 당뇨 증상을 소갈, 소중(消中), 소신(消腎) 세 종류로 나누고 치료도 세분했다. 동의보감은 소갈의 증상에 대해 ‘중초(中焦·횡격막과 배꼽 사이의 소화기관)에 열이 몰린 것을 비장(脾臟)이 허하여 받으면 위가 훈증되면서 음식이 빨리 소화되고 배가 금방 고프며 곱으로 먹게 되나 살이 찌지 않는다. 오줌을 자주 누고 갈증이 심하며 오줌 맛이 달다’고 썼다. 당뇨 환자에게 쌀밥이 아닌 보리밥을 권하는 이유다. 
 
 
보리는 발아시키면 약성이 크게 달라진다. 맥아(麥芽·엿기름)는 최고의 소화제다. 맥아를 발효시켜 만든 식혜가 잔치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도 배고픈 시절 갑작스러운 과식으로 고장 난 위장의 소화력을 도우려는 지혜다. 보리는 음식을 삭이는 작용뿐 아니라 젖을 삭이는 작용도 뛰어나다. 중국 청나라 의학자 오겸이 쓴 ‘의종금감’에는 맥아를 ‘산후에 젖이 뭉치고 열이 나는 데 사용한다’며 단유(젖을 끊는 것)할 때 처방했다. 실제 맥아 40g 정도를 끓여서 먹거나 분말로 복용하면 젖을 삭이고, 젖이 부은 상태를 해소하는 데 좋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