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공신들은 중종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 씨를 강제로 헤어지게 했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매부 사이였고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은 장경왕후로 인종을 낳고 난 후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왕비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여인, 문정왕후다. 결혼 17년 만에(중종 29년) 두 딸을 낳은 후 훗날 명종이 되는 왕자를 생산했다.
조선의 ‘마마보이’ 명종은 임금이 된 이후에도 계속 모친의 극성스러운 보호를 받는다. 문정왕후는 중종이 사망하자 아들 명종이 곡(哭)을 못하게 막았다. “주상께서 큰 역질(疫疾)을 앓으신 지 오래지 않아 기가 허약하다”는 게 이유였다. 재위 12년엔 날씨가 추워 명종의 감기가 오래가자 궁의 처마 밑에 털장막을 쳐 한기를 막았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은 것도 문정왕후의 계속된 괴롭힘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문정왕후의 이런 성마른 성격이 아들 명종조차 병들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쳤다… 임금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목 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명종을 괴롭힌 심열증의 뿌리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 명종의 심열증은 재위 22년 더욱 심해졌다. 중국 사신이 온다고 하자 지레 겁을 먹고 고민에 빠졌다. 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이 평소 심열이 있는 데다 사신을 영접할 걱정에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고 묘사했다.
명종의 심열증을 치료한 명약은 ‘우황청심환’이었다. 우황청심환의 기원은 중국 송나라 때 의서인 ‘태평혜민화제국방’에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의보감 처방을 기준으로 하는데, 약의 양이나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 약물 구성에서는 ‘경면주사(鏡面朱砂)’가 첨가돼 심신의 안정 작용이 강화됐다. 허준 선생이 참고했다는 중국의 ‘본초휘언’에는 “우황은 마음을 치료하는 약물이지만 주사(朱砂)와 함께 쓰면 안정시키는 기능이 더욱 커진다”고 쓰여 있다. 구성 약물은 29가지에 이를 정도로 많다. 세 가지 처방이 합해져 있는데 대산여원은 질병 후에 기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쓰는 보강의 약물이고 자감초탕은 심장의 힘이 떨어져 생기는 부정맥에 사용하는 처방이다. 구미청심원은 심장을 직접 진정시키는 처방이다. 중국의 청심환은 구미청심원의 처방만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순조 때 한양의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에 조선 우황청심환의 인기가 드러난다. “북경 사신들에게 최고 인기 품목은 우황청심환이다. 사절로 오면 왕공부터 귀인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얻으려 했다. 약방(藥方)을 가져가 그대로 만들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어떤 이는 ‘연경에는 우황이 없고 낙타황으로 대용하기에 약방에 따라 만들어도 효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