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과 왕비에게 부여된 가장 큰 책무는 후계자를 낳는 것이었다.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에 낳은 효장세자(1719∼1728)는 일찍 세상을 등졌다. 이후 영조는 모든 국가적 의료 시스템과 음식보양법, 생활방법 등 의료 지식을 총동원해 왕자 생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9년 기록을 보면 그 절박함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삼종의 혈맥(효종, 현종, 숙종)을 생각하니 이것(왕자의 생산)은 정말 절박하다. 지금 나이가 벌써 마흔이다. 보통 사람으로 말한다면 쉰과 같으니 모든 방법을 다 써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당시 이조판서였던 송인명은 “익모초(益母草)는 후사를 얻는 데 큰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다른 신하 권수경은 “남자 나이 사오십은 노쇠해지는 경계입니다. 양기가 으레 부족하기 때문에 팔미원(八味元)에 녹용을 추가한 것이 곧 양기를 보하는 약제이니 즉시 드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영조는 “의서라는 것은 과장된 측면도 있어 다 믿을 수 없다”고 반신반의한다. 그러자 영의정 심수현은 “한성참판을 지낸 박내정이 자식 낳을 가망성도 없을 정도로 약했는데 (팔미지황환을 먹고) 일흔이 넘도록 건강하다”며 처방을 강권한다. 영조는 결국 신하들과 어의들의 건의를 수용한다. 이후 영조 11년(1735년) 나이 마흔둘에 탄생한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가 바로 사도세자다.
익모초는 여성의 난임 극복을 돕는 좋은 약물이다. 이름에 어미 모(母)가 들어간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익모초는 여성에게 흔히 발생하는 상열하한(上熱下寒·인체 상부는 열이 오르고 하부는 찬) 증상을 치료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익모초가 하고초(夏枯草)로도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시드는 풀’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몸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떠오르는 양기를 수렴해 아랫배를 따뜻하게 유지시킨다. 그래서 전통 민속에는 유둣날(음력 6월 15일) 익모초를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일까. 익모초 생즙을 마시면 한여름 더위에 사라진 입맛이 돌아오기도 한다.
상열 증상을 잡아주는 특성 덕에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는 피부에 오른 열을 내리고 윤기를 더하기 위한 특효약으로 익모초를 갈아 팩으로 사용했다. 우리 조상들도 신생아나 소아가 가려움증을 동반한 피부염에 걸리면 익모초 달인 물에 목욕시키는 민간요법을 널리 사용했다. 염증으로 인한 열을 내려 가려움증을 가라앉힌 것이다.
난임을 해결하는 민간요법으로 많이 사용된 또 다른 처방은 어교(魚膠·수산물로 만든 아교)의 재료로 쓰이는 민어의 부레다. 어교는 활(각궁)을 만들 때 접착제로 쓰일 만큼 강한 접착력을 가지고 있다. 자궁과 태반 사이는 단단히 연결돼 있어야 혈관 공급이 잘되면서 임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두 기관을 단단하게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 게 민어 부레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농서 ‘산림경제’는 임신에 좋은 음식으로 장어 녹용 해구신 참새 알 등을 거론했지만 임신에 방해되는 음식도 같이 거론했다. 삼백초 고사리 토끼고기가 그것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