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무서운 병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적지 않다. 종기는 조선시대 수많은 임금의 목숨을 위협했지만 요즘은 환자를 찾기 힘들다. 주렁주렁 누런 콧물을 달고 다녔던 꼬마 축농증 환자도 사라졌다. 가슴팍에 손수건을 붙인 초등학교 입학식은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다.
더위 먹어 생긴 서증(暑症)도 에어컨 냉장고 보급으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보통 가슴이 답답하면서 온몸에 열이 나고 두통과 갈증이 심해 몸이 나른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임금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온몸에 두꺼운 용포를 걸치고 하루 종일 에어컨도 없는 실내에서 ‘우아함’을 뽐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고통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더위를 식힐 유일한 방법은 시원한 우물물이나 석빙고에서 꺼내온 얼음을 연신 먹는 것뿐.
서증을 달래기 위해 당시 백성들은 꿈도 못 꿨을 얼음을 자주 먹어서 그런 것일까. 승정원일기에는 조선 임금들의 여름 복통과 설사 기록이 적지 않다. 인조 10년 여름 어느 날 기록이다. “설사가 너무 잦은 나머지 드신 음식이 흰죽의 물 조금뿐이었습니다. 옥후(玉候)가 미령한 지 벌써 10여 일이 되었는데 수라를 전폐하여 원기가 허약합니다. 서증 후 설사 증세라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영조도 재위 9년 여름에 똑같은 증세를 토로했다. 내의원 수의(首醫) 권성징이 “성상의 증후가 대체로는 서증인데 필시 내상(內傷)을 입었기 때문이니 날것과 찬 것을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영조는 “날것과 찬 것을 먹지 않기는 어렵다”고 즉답한다. 푹푹 찌는 더위에 시원한 물과 과일, 야채마저 먹지 못하게 하는 수의에게 짜증내는 영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의보감은 여름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금기 사항들을 강조했다. “더위가 기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얼음물과 찬 과일을 많이 먹지 말고 술과 성생활을 줄여라.” 중요한 것은 더워 갈증이 심해도 찬물을 자주 마시거나 과일을 많이 먹지 말라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더위로 인한 갈증을 없애기 위해 가장 많이 등장한 처방은 매실이다. 그중 덜 익은 매실을 훈증한 오매(烏梅)라는 약재가 그 핵심이다. 매실은 처음에는 파랗다가 때를 지나면서 노랗게 익는다. 풋 익어 독이 있는 푸른 매실을 소금에 푹 절여 만든 백매(白梅)를 불에 굽고 말린 것이 오매다. 오매의 가장 큰 위력은 꿀잠에 있다. 동의보감은 오매를 차로 마시면 잠을 잘 오게 한다고 기록했다.
매실의 새콤한 맛은 침을 분비하게 해 갈증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조조의 매실 관련 고사도 유명하다. 위나라 조조가 삼복더위에 길을 잃어 목마르고 피로한 병졸들에게 “산을 넘으면 매화나무 숲이 있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지연의가 쓰였을 당시 사람들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입에 침이 고이고 갈증이 해소되는 매실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매실의 효능은 현대과학으로도 재조명돼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매실에는 구연산이 19%, 사과산이 1.5% 포함돼 있다. 알칼리성을 띤 구연산은 피로 해소와 체질 개선에 효과가 있는 데다 소화불량과 위장 장애를 개선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