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0-06-28 11:14
제 목
생명의 시작과 끝은 하나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생물학적 해석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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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의 순환과 심장박동이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생물학적 과정은 아무리 복잡한 경로를 거치는 경우라도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반야(般若)는 배가 떠나면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반은 돌아올 반·선회할 반이고, 야는 같다는 뜻으로 둥근 원의 형태를 말한다.

배가 떠나는 모습은 직선이지만 돌아오면 포물선의 형태인 원이 되는 것이다. 반야·원은 자연에서 추상되는 가장 단순한 모습이다. 이런 점을 외적 다양성이 내적 단순성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나 서민의 삶이 서로 달라보여도 밥 먹고 잠자고 변소를 가는 단순한 모습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과 같다. 생물에서도 나무 줄기와 동물의 이빨처럼 동심원을 이루거나 달팽이 껍질과 양의 뿔처럼 나선형을 이루는 등 간단한 몇 가지 법칙으로 다양성을 이룬다.

반야라는 둥근 원은 자연의 다양성 속에서 가장 단순한 모습이며 핵심을 압축한 것이다. 다양성 속에서 단순성을 파악하는 것은 불교에서 미혹(迷惑)을 끊고 지혜를 얻는다는 것과 같으며 반야의 본래적 의미와 일치하는 것이다.

반야는 0이다. 덧셈과 뺄셈을 합하면 0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인과(因果)라 하며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과율은 내가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며 그 어떤 예외도 없음을 수학적 공식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원은 순환의 모습이다. 자연의 모든 모습은 둥그런 원이다. 하루는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서 서쪽으로 넘어가고 달도 역시 같은 모습의 원운동을 한다. 한달도 마찬가지고 일년도 같다. 

생물도 순환한다. 대부분의 생물학적 과정은 아무리 복잡한 경로를 거치는 경우라도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혈액의 순환이 그렇고, 심장박동도 마찬가지다. 신경계의 감각과 반응, 월경이나 짝짓기, 에너지 생성과 소모의 사이클, 생명의 탄생과 사망주기 등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 원래대로 돌아가는 순환구조를 가진다.

물질도 마찬가지다. 생물계 어디서든 섭취와 배출은 균형을 이루며 한 생물의 폐기물은 다른 생물의 먹이나 구성물질이 된다. 소의 배설물은 세균에서 흙, 지렁이, 풀을 거쳐 다시 소로 돌아간다. 분자 수준에서 보면 주요 원자들은 일련의 작은 단계를 거쳐 분자에서 분자로 전달된다.

한 과정의 최종산물은 다른 과정의 출발이 되며 전체 과정은 하나의 순환고리로 연결된다. 원점으로 돌아오지만 이전과는 다른 정보가 축적되어 스프링처럼 이어져 계속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이어져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원은 항상 내부와 외부로 나뉘어진다. 외부없는 내부는 없으며 서로에 의존한다. 생명체도 껍질로서 방어막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껍질 속은 자기의 내부이지만 그 내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선택적인 물질의 공급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공(空)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는 상호의존적인 면을 포함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공은 없다는 면뿐만 아니라 서로 의존적인 관계, 연기(緣起)를 말하는 것이다.

원을 이루는 선의 내부는 외부보다 작은 경계다. 우리가 보고 사는 삶이 좁은 울타리 속에 갇힌 양식어장과 같은 것임을 말한다. 그 너머에는 상상하기 힘든 완전하고 넓은 바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헤르만 헤세가 말하는 ‘알을 깨다’라는 말처럼 양식 인간으로서의 삶을 넘어 자신을 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반야의 0은 공(空)이다. 공수래 공수거의 무(無)라는 뜻이다. 현상계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채 다시 돌아가야 하는 빈손일 뿐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며 집착할 그 무엇은 아니라는 것이다. 배가 항구를 떠나 다시 귀항하는 사이에는 뱃길이 있다. 삶은 뱃길처럼 길 위에 서서 멈출 수 없으며 끊임없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자가용으로 경부선을 달려가다 주변 풍광에 마음을 뺏기다 보면 사고가 나는 것처럼 슬픔과 분노, 괴로움과 질병은 풍광에 불과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마음을 뺏기지 않고, 지켜볼 뿐 달려가다 보면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순환의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0은 중심점에서 똑같은 거리에 위치한다. 가깝거나 먼 것 없이 모두가 똑같은 거리에 있음은 생명이 추구하는 최적화의 가치와 일치한다. 최적화는 바로 적절한 양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많거나 적은 혈당량은 죽음을 가져온다. 무기염류, 비타민, 칼슘, 철, 운동, 잠 등에서도 일치한다.

분자 수준에서 생물은 정교한 신호 및 관리체계를 통해 적정수준을 유지한다. 최대화는 중독의 형태로 나타난다. 부, 쾌락, 권력과 같은 가치의 최대화는 바로 중독 성향을 나타낸다. 적절한 균형의 가치이며 중도를 얻었다는 것과 같다.

바라밀(波羅蜜)은 생물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바’는 실과 같은 섬유가닥이고 ‘라’는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 실타래를 이루는 것이며, ‘밀’은 꿀과 같은 기질이 실타래를 채워 형태를 완성하는 모습인 것이다.

색즉시공의 색이 만들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 반대 과정은 공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기질인 밀이 빠져 나가고 실타래가 남았다가 섬유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주괴공의 과정인 것이다.

세포를 관찰해 보면 이 과정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신경세포는 신경섬유로, 근육세포는 근섬유로, 골세포는 작은 섬유와 기질로 뼈 기둥을 신축하는 것이다. 뼈뿐만 아니라 연골,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인대나 관절포를 만드는 것은 교원섬유다. 교원섬유는 콜라겐이라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콜라겐 섬유라고도 불린다.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조면 소포체와 골지체에 의해 콜라겐의 전구체에 해당하는 프로콜라겐이 만들어지고, 이 분자가 세포 밖으로 방출되면서 콜라겐 분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모여 다시 굵은 다발을 이루어 콜라겐 섬유가 된다. 세포 밖으로 방출되는 순간에 콜라겐 섬유로 굳어지는 젤라틴 모양의 물질이 누에가 실을 토해내는 것처럼 분비된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압축한 것이 반야인 ‘원’이라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압축한 것이 ‘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너무나 분명한데 우리는 언어적 수사에 빠져 사실 넘어 진리를 찾아 헤매지는 않는가? 
 
이상곤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