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2-06-05 16:10
제 목
차 한잔의 사색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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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신라의 원효는 ‘차(茶)와 군자(君子)는 불기(不器)’라 하였으니, 범부의 세치 혀로 어찌 군자의 인품을 논할 것이며 그윽하고 높은 차의 경지를 두고 호(好) 불호(不好)의 잣대로 함부로 재고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2000여년 전 가야와 신라 흥덕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에 들어와 차와 선(禪)을 동일시한 선종의 도입으로 절정기를 이루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서예가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을 중심으로 차의 중흥기를 이루었다.

전남 강진으로 유배간 정약용은 19년간의 유배생활 중 10년간을 이곳에서 보내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 걸쳐 508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러면서 그는 백련사에 주석하는 초의선사와 우정을 나누며 다도를 통해 승(僧)과 속(俗), 계율과 제도를 초월하여 서로 인간적인 교감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저 멀리 은빛 파도가 일렁이는 구강포를 내려다보며 건곤일척의 큰 꿈을 가슴에 잠재운 채 솔바람 소리에 귀를 씻어야 했던 불우한 선각자. 다산초당에서 야트막한 만덕산(일명 다산) 등성이를 넘어 백련사 가는 길은 어쩌면 고향 집으로 가는 길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오솔길에 빨갛게 익어가는 까치밥도 반가웠다. 한두 주만 일찍 왔더라면 절 입구에 핀 동백꽃의 장관을 볼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걸 놓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약식동원이던가? 잠깐 차에 대한 몇 가지를 묵상한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차나무는 음지에서 자라기를 좋아하며, 잎은 겨울의 눈보라를 이겨낸 터여서 본디 냉(冷)하므로 마실 때에는 반드시 뜨거운 물로 우려내어 평온(平溫)하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차는 약간 냉한 불발효차인 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 따뜻하게 발효해진 홍차, 따뜻하면서 후발효차인 보이차로 대별된다. 몸이 찬 체질은 홍차·보이차·우롱차가 좋고, 몸이 더운 체질은 녹차나 우롱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

차에는 비타민C, 카페인, 탄닌, 비타민A·B, 철분 등 인체에 유용한 성분이 많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며 노폐물을 밖으로 배설시켜 피부를 부드럽게 한다. 음주로 인한 숙취에도 좋으며 심장을 강하게 하고 고혈압이나 당뇨·암 등의 성인병 예방에도 효험이 있다.

차는 눈으로 음미하고 마음으로 관조하면서 코로 은은한 향에 취해 마시는 것이 제격이다. 이런 걸 두고 옛사람들은 멋 가운데서 진짜 멋이라 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양에서 커피가 들어와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다방이 생겨나면서 ‘차마님’이 마담으로 바뀌고 차 배달하며 시중드는 전문직 아가씨까지 생겨났다.

폐일언하고, 송나라 때의 수단선사는 다도를 일러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 하였다. 즉 ‘화(和)’는 화목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의 마음 됨됨이를, ‘경(敬)’은 차를 대하는 공경의 자세, 물 한 방울 차 한톨도 내게 그냥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며, ‘청(淸)’은 다기와 다실과 사람이 모두 깨끗하며, ‘적(寂)’은 고요한 가운데 이르는 무아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를 마시는 시간은 온전한 자유를 음미하는 나만의 청정한 사색의 시간이요 공간이다. 그러기에 차와 난(蘭)과 독서는 비할 데 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리라.

임진년 한해도 벌써 5월이다. 올 한해도 끝없이 펼쳐진 푸른차 밭의 향연처럼 고운 향과 색, 맛이 가득한 나날이였으면 좋겠다. 가까운 벗님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며 내 가정과 이웃에게 차와 같은 역할을 다하며 향기로운 여유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 것을 홀로 다짐해 본다.


윤종원 원장
(호성한의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