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한의원
등록일 : 2013-04-09 11:30
제 목
질병의 진화
작성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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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아마 여러분들이 젊었을 때와 지금의 질병 상태를 비교해 보면 그 변화가 엄청 많음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놀랠 것이다. 따라서 병명도 요즘엔 예전에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희한한 병이 다 있다. 실제로 70년대만 해도 우리가 길을 걷다가 허리가 기억자로 굽은 채로 지팡이를 짚고 가는 꼬부랑 할머니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많던 꼬부랑 할머니들은 지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나이 칠십이 되어서도 뾰족구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는 뒷모습이 마치 아가씨 같은 할머니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 꼬부랑 할머니들의 병명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여러분들은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A야, C각, D곱하면서 시험을 치기 위해 외우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A야는 야맹증엔 비타민 A, C각은 각기병엔 비타민 C, D곱은 곱추병엔 비타민 D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론 꼬부랑 할머니는 비타민 D가 부족하다는 것이 전부다. 맞는 말이다. 심한 골다공증으로 인한 척추체들의 압박변형이나 또는 당시에 흔했던 결핵성 척추염의 후유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척추수술이라고 하면 거의가 결핵환자였다. 

그러나 결핵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에 퇴행성 변화로 인한 ‘척추판 협착증’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병은 숨기기 힘들다. 걸음걸이를 보면 척추관 협착증을 지닌 사람들은 티가 난다. 엉거주춤 허리를 꾸부리거나 골반을 앞으로 내민 특유의 걸음걸이를 보인다. 동기들을 만나 봐도 이런 걸음걸이를 하는 친구들을 꽤 볼 수 있다. 다른 관절에도 시대적 변화는 많았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엉치관절의 ‘대퇴골두 무형성괴사’라는 질환이 만연했었다. 우리 동기 아들 중에도 이 병으로 평생을 투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크게 줄었고, 대신 무릎관절의 ‘퇴행성 관절염’이 크게 늘어났다. 족부 질환에서도 선천성 기형인 ‘첨내반족(club foot)’은 줄어들었고 대사성 질환인 ‘통풍’이 늘어났다. 

또 어깨 관절의 ‘회전근개 파열’이 전에 없이 늘어났다. 이런 질병 패턴의 변화는 정형외과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심장하면 ‘판막증’이 대세였다. 이때만 해도 서양의학에선 속수무책이어서 한의원을 찾는 환자가 많았다. 그러나 90년도에 들어서면서 지금은 이런 환자보다 관상동맥이 좁아지는 허혈성 질환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스텐트’를 삽입하여 좁아진 혈관을 넓히는 시술이 전성기를 맞았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동기들 중에도 이 수술을 받은 사람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도 세 번째 이 수술을 받고 현재 요양 중인 친구도 있다. 쾌유를 빈다. 이렇게 나가다간 얼마 안 있으면 심장이 벌렁이거나 불규칙적으로 뛰는 병인 ‘부정맥’이라는 리듬성 질환이 심장계의 주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왜냐하면 생활의 패턴이 빨라지고 커피를 중독성으로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이유에서지만, 해마다 스타 탄생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병명도 있다. 예전엔 주목받지 못하던 거들떠 보지도 않던 질병 명칭들이 어느 날 갑자기 중앙 무대에서 스폿라이트를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50년대 어느 의사가 구석에 적어 놓았던 논문이 시체공시소에서 갑자기 부활하여 느닷없이 학회의 주목을 받고 그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한다. 주의력 결핍 행동과잉장애(ADHD), 섬유근통증후군((FMS) 등등이 이것이다. 우리 집사람도 지난해 외국 나가려고 검진을 받았더니 ‘섬유성 폐질환’이란 희귀한 병명의 진단을 받았다. 그 병이 뭐냐구 하니까 폐의 섬유 조직이 굳어지는 희귀성 질환이란다. 특별한 약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질병 패턴이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처럼 질병이 변하는 것을 ‘질병의 진화’라 한다.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게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것이 <주역>의 핵심 사상이다. 그러니 질병의 패턴이 변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인류의 유전자가 모두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신체구조가 천지개벽을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바뀐 것은 먹는 것, 영양상태, 토양과 공기의 오염도, 생활양식 등등 ‘환경적 요인’ 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생활양식의 변화는 육체적 면과 정신적 면 모두에서 큰 변화를 야기했다. 예를 들어 오강이 사라졌다. 예전엔 화장실이 집에서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신발 신고 대문 밖으로 나가야 화장실(그 땐 뒷간)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한 겨울에 뒷간엘 가려면 단단히 차려 입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뒷간에 한번 가려면 온 식구가 동원되었다. 더구나 무서움을 잘 타는 아이들에겐 뒷간 가는 것이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래서 뒷간에 갈 때는 식구 한사람을 대동해 뒷간 앞에서 지키고 서 있게 했다. 그러니 그 때 요강은 아주 요긴한 가정 필수품이어서 혼수감으로도 이 요강이 꼭 들어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집집마다 도자기로 만든 혹은 양은으로 만든 요강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이 별안간 집안으로 들어왔다. 또한 그 당시엔 전통적인 주택구조는 섬돌 딛고 마루 위로, 문지방 넘어 안방으로 또 다락으로, 혹은 깊숙한 부엌으로 끊임없이 오르내리던 수직형 구조였다. 그런데 어느새 문지방마저 깔끔하게 밀어버린 완전 수평형 평면구조로 변해 버렸다. 그만큼 근육을 쓰는 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더구나 한 자세로 앉아서 오랫동안 컴퓨터를 하거나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가 지금 등을 꾸부려 이 글을 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등이 굽고 목이 거북이처럼 앞으로 쑥 나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목도 아프고 등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다고 호소한다. 나이 오십에 나타나던 ‘오십견’이 이젠 ‘사십견’이 된지 오래다. 또한, 조급하고 빡빡한 경쟁 구도 속에서 마음은 늘 피곤하고 화가 나고 쉽게 지친다. 위생은 개선되고, 영양은 과잉 편중되고, 몸을 쓰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마음은 바쁘다. 바로 이런 변화들이 질병의 패턴을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김포 허산자락 귀락당 낙우재에서 포옹 한송-
정우열 명예교수 /원광대 한의대